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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대 대통령 2차 선거 연설


제 14대 대통령 2차 선거 연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민주자유당 후보 김영삼입니다.

     지금 저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 가운데는 저와 함께 한국 현대사의 파란과 곡절을 체험한 기성세대도 있고 그 시대를 전혀 모르는 젊은 세대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살아온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 먼저 몇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저는 험한 바다와 싸워야 하는 어부의 아들로 남쪽 바닷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 시절 은사께서 모든 학문은 철학으로 시작한다고 말씀하신 데 영향을 받고 저는 서울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래를 향한 꿈을 키워 왔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정부가 발주한 서울 사수라는 방송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경기도 이천의 친구집에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정부는 절대로 국민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54년 5월 파란만장한 저의 정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해 우리 헌정사상 가장 젊은 나이라는 25살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의 정치 역정 40여년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온갖 영욕을 동시에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야당의 외길을 걸어온 저에게는 부귀와 영달의 유혹도 있었고, 생명을 위협하는 온갖 테러와 박해도 있었습니다. 1972년 하버드대학에서 연설하기 위해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습니다. 비상계엄이 내려지고 국회가 해산되었으며, 저의 주변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귀국을 늦추라는 저의 아내의 울음 섞인 전화가 수없이 왔습니다. 미국의 국무성 관리들도 투옥의 위험을 듣고 한결같이 귀국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의 안일보다 국가의 장래가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즉시 돌아왔으나, 예상대로 상도동 집에 연금 되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79년 10월 4일 유신 정부에 의해 저는 25년간 몸담아 온 국회에서 기어이 제명 당하는 치욕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날 수많은 사복경찰과 국회 경위들이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차단한 채, 헌정사상 유례없는 야당 총재 제명을 의사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결의하고 단 1분만에 본회의를 끝냈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언덕 절두산이 바라보이는 국회의사당에서 저의 목을 잘랐습니다. 저는 그때 의사당 의석에 홀로 앉아서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국민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이 보이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의 제명 파동은 끝없는 정치적 격동과 커다란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부마 사태라는 시민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0·26이라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했고, 유신체제는 붕괴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역사의 준엄한 흐름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은 83년 5월 18일 저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광주 유혈 사태를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했습니다. 저는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피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택연금 중에 단식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단식한지 보름이 넘으면서 점차 의식을 잃어 갔습니다. 마치 얼마 남지 않은 촛불이 꺼져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의식이 회복된 뒤에야 제가 23일간 단식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의 단식투쟁은 국내외에 파문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반독재 운동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이로 인해 87년 6월 마침내 6·29선언을 쟁취했습니다.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일부 야당 정치인은 6·29선언을 쟁취해 내는데 앞장섰던 통일민주당을 뛰쳐나가 야당을 새로 하나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야당 단일후보를 위해 타협과 경선 등 모든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야당은 분열되고 정권교체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저의 부덕의 소치였었습니다.

     그 후의 실시된 88년 4·26총선의 결과는 잘 아다시피 여소야대의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해 올림픽을 끝내고 곧바로 5공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89년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이해 집단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대학가는 날마다 시위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여의도 의사당 광장도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농산물을 싣고 온 농민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5월에 들어서는 부산 동의대 사건으로 여러 명의 경찰관이 숨지고, 부상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생들은 판문점으로 몰리고, 서경원 의원과 임수경양이 몰래 북한에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던 당시의 정부로서는 한마디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위기가 닥쳐오는데도 전혀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중에는 물정부라는 말까지 떠돌았습니다. 뜻 있는 사람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습니다.

     이 같은 총체적 위기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을 때, 당시 노 대통령이 사람을 보내 3당 통합을 하자고 여러 번 저에게 제의해 왔습니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으로서는 마지막 돌파구가 여소야대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30년 이상 야당 한길만을 걸어왔던 저로서는 쉽게 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면, 여소야대를 극복하는 것이 대안이었지만, 그러나 저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고뇌는 제 일생에서 가장 길고 곤욕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하고 상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가 일쑤였었습니다. 과연 제가 3당 통합에 응했을 때 역사가 이것을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해 줄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용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3당 통합을 하자. 6·29선언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싸움이 끝난 이상, 이 난국을 극복하고 민주화 세력과 근대화 추진세력을 한데 묶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민들은 3당 통합을 잘한 일로 평가해 주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통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만약 그때 3당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파괴적 혼란이 계속되었더라면 과연 우리 나라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그러나 3당 통합 후에도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제각기 체질이 다른 3당이 모였으니, 그렇게 순탄할 리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한 지붕 세가족이었습니다. 저 자신 3당 통합을 후회한 적도 있었고, 노 대통령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 길은 고통 속에서 신뢰를 굳혀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집권당 최초로 경선에 의해 대통령 후보와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진통 속에서 많은 성과를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잃은 것도 많습니다. 지금 모두들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경제라는 것은 우리 생활 속에 직접 부딪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가 가장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 전체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실체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진단을 정확히 하고 그 원인을 밝혀 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처방을 내려야만 합니다. 여러분께서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 주신다면 제가 서둘러 해야 할 일은 나라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같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것은 강력한 지도력과 결단력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지도력과 결단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돈이나 총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민의 지지와 집권 과정의 정당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거가 공명정대 해야만 합니다. 공명선거는 권력과 돈이 개입하지 않고, 흑색선전이 없는 깨끗한 선거입니다. 저는 집권 여당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중립내각의 구성을 제의했습니다. 이제 권력이 개입하는 선거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금권 타락이 우리 선거를 더욱 혼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돈으로 권력을 부패시켰던 사람들이 아예 돈으로 권력을 사려고 합니다. 우리는 금권 선거를 철저히 추방해야 하고 응징해야 합니다. 돈으로 권력을 사려는 것은 총칼로 쿠데타를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입니다. 아무리 돈으로 권력을 사려고 해도 수준 높은 우리 국민은 그러한 그릇된 후보들을 단호하게 배격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국민 여러분 저의 정치 역정 40년은 변화와 개혁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의 선택 기준도 누가 이 나라를 변화시키고 개혁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국회에 과반수 의석을 가진 저와 우리 민주자유당만이 국정 개혁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국회 의석의 10분의 1이나 3분의 1밖에 안되는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과연 이 나라 정치가 안정될 수 있겠습니까? 침체된 경제를 되살릴 수 있겠습니까? 통일을 위한 준비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현명하신 국민 여러분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새로운 결의로 다시 뛰기 시작하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각 분야에 걸쳐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땀과 고통도 요구하겠습니다. 국민 모두가 신바람이 나서 일하는 사회를 건설해야만 합니다. 농민도 근로자도 도시 서민도 누구나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넘치는 신한국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제 나름의 40년 정치 경험을 살려 이 나라의 대들보를 튼튼하게 올려놓고, 우리의 뒤를 이을 젊은 세대에게 바톤을 넘겨 21세기 한민족 웅비의 시대를 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유세를 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뒤돌아보며 가슴 뭉클한 감동에 젖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슬기가 있었고 강인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역사의 정신이 오늘 이 순간까지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난국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국민의 정열을 믿기 때문입니다. 황영조 선 수는 마의 언덕을 극복했기에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강한 의지와 굳은 신념이 필요합니다.

     우리 다시 뜁시다. 이 김영삼이 앞장서겠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을 모시고 신한국을 건설하여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 태어나서 이 나라에서 살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할 것입니다. 끝까지 시청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다음 이 시간에 다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92. 12. 6, MBC-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