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총재를 비롯해 야당권에서 내각제 개헌을 계속해서 쟁점으로 내세워 공격을 했다. 국회 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하자고 해도 개헌이 걸림돌이 되었다. 나로서는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면 개헌은 안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면 개헌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제기해서 추진해 보겠다고 나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고 나는 내 생각을 정직하게 말했다.
나는 당내의 개헌 추진파들에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된다고 했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개헌 얘기만 하니까 개헌은 무조건 싫다는 게 국민 감정이다. 김대중 총재는 민자당이 인기 없는 개헌에 나섰다가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지금 할 일은 정치를 복원하고 개혁을 하는 일이다. 민자당의 지지 기반이 탄탄해지면 도리어 내각제 개헌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야당이 하게 된다.
나의 이런 얘기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노 대통령도 개헌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민정계가 거의 전원 그리고 청와대 진용도 모두 내각제 일색이고 대통령도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야당이 합당에 반대하고 있고 합당이 개헌 음모라고 몰아대고 있는데, 이런 때에 개헌 얘기를 하는 것은 개헌을 도리어 안 되도록 하는 것이다. 권력 구조에 관한 개헌은 야당이 제기하고 여당이 이를 받아들일 때 가장 순리로 처리된다. 내가 이런 얘기를 했는데 노 대통령은 이것을 소극적인 자세로 보는 듯했다.내각제 개헌에 최선을 다한다면 대통령으로서 김 대표를 지원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내각제 개헌이 실패로 돌아가 대통령 후보를 결정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민주적 경선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김대표를 도와주기 어렵다. 설사 내가 도울 생각이 있다 해도 민정계와 공화계의 김 대표에 대한 거부와 반발을 수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통령이 이때 이런 말을 내게 하는 정도였다. 모두들 내가 개헌에 소극적이라고 보고 적극적인 자세가 되도록 하기 위해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심전심으로 하고 있는 듯이 비쳤다. 그만큼 모두가 내각제를 원하고 있었다. 심지어 개헌에 적극적인 사람들 중 일부는 당 대표인 나를 개헌을 추진하는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서는 대통령 선거에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를 개헌 운동에 내세우기 위해 여러가지 압력 수단을 동원했다. 10월에 일어난 각서 파동도 개헌을 추진하기 위한 압력의 하나로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당에서는 연말까지 개헌 논의는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있었는데, 아마 이대로 해를 넘겨서는 안된다고 초조감이 있었던 듯하다. 즉 개헌을 하자면 1991년 정초에는 이를 공론화해야 하고, 그러자면 개헌에 대한 나의 결심을 받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