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방문단을 구성하던 중 박철언 장관측에서 "소련 방문에 동행하는 것이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표면적 이유로 내세운 것을 보면 현직 관료가 정당 최고위원의 외국 활동에 수행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나는 이 발언을 무시해 버렸지만 민주계 의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 좋지 않은 얘기들이 오갔다. 그 무렵 박철언 의원은 적절하지 않은 발언으로 문제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그는 권력에 대한 묵계란 있을 수 없다. 그런 묵계가 있었다 해도 지켜지겠는가, 김영삼 최고위원의 위상(位相)은 그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도 했다.
그는 노태우 이후는 김영삼 씨라는 것이 합당의 합의로 알려져 있는 소문을 부정하고 싶어 이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같은 발언은 정무장관으로서는 적절치 않은 발언이다. 더욱이 발언의 내용도 무례하고 도발적이었다. 그는 소련방문도 손상하려 했다. 5월에는 자신의 소련 방문이 계획되어 있다, 이번 방문은 소련측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아 우리 대표단이 주목받지 못할지 모른다고도 그는 말했다.
나는 3당 합당의 실무 교섭 과정에서 보여준 박철언 의원의 기획력과 일에 대한 추진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그는 노 대통령을 수시로 만나 정책을 건의하고 사조직 월계수회를 급성장시키는 등 야망을 가진 사람으로 비쳤다. 정치인으로서 대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는 당시 국민들로부터 직접 표를 받아본 일이 없는 전국구 초선 의원이었다.그런 박 의원이 정치적 위계 질서를 깨는 일을 한다면 언젠가 한번은 누군가에게 다스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장관 겸직 의원이었기 때문에 나는 수행원들에게 박 의원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소련측에서는 나를 국가 원수에 준하는 프로토콜로서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3월 21일 오전 소련공산당 국제 담당 정치위원 야코블레프와 회담한 자리에서 나는 연내에 한.소 정상회담과 한.소 수교를 제의했다. 야코블레프도 이견은 없었다. 다만 그는 소련 경제 협력 등 실질 관계를 축적시킨 뒤 현안을 다루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나는야코블레프와 이날 밤 만찬을 함께 하면서 양국의 현안을 더 논의하기로 하고 소련측에서 숙소로 제공한 영빈관 '옥토스프가야'(10월의 집)에 돌아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저녁 6시 10분 소련연방회의 의장 프리마코프가 돌연 찾아와 나를 크레믈린 궁으로 안내했다. 프리마코프는 나의 1차 소련 방문시의 초청자로 그간 나와는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그는 나를 크레믈린 궁으로 안내하는 목적을 처음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야코블레프와의 만찬 약속을 미루고 프리마코프를 따 라나섰다. 나는 크레믈린 궁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났다.그는 프리마코프 의장실에 잠시 들르는 형식으로 나와 회동을 했다. 그때까지 한국과 소련은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편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였다.이 회동에서 나는 연내 한 소 정상회담과 한 소 수교의 실현을 제의하여 고르바초프 서기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다만 이날 나와 고르바초프와의 회동이 급작스럽게 이뤄지는 바람에 박철언 의원이 보관하고 있던 노 대통령의 친서를 고르바초프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의 친서는 다음날 다른 경로를 통해 정중하게 전달되었다.
나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이 단순히 외교적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소련 국민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의 상(像)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2차 방소 기간 나는 모스크바대학에 가서 연설을 했고, 5만 명의 군중이 모인 축구장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하루 수만 명이 드나드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았고, 7천만 신도를 가진 러시아 정교 총주교와 점심을 같이 했다. 내가 소련 국민 대중 앞에 왔다갔다하고 이를 소련 언론이 보도하는 것이야말로 한 소 관계를 개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박철언 의원은 "막후 협상에서 소련 쪽의 태도에 실질적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고르바초프 김영삼 회담이 이루어진 점이 대단히 부담스럽다"느니 "소련과의 관계 개선 시기가 김 최고위원의 행동 때문에 몇 년 늦어지겠다"고 나의 외교적 성과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후의 한 소 관계 진전에 따라 박 의원의 발언이나 예상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증명되었지만 당장은 대단한 역기능을 폈다. 나는 귀국한 다음날인 3월 30일 청와대에 들어가 소련 방문 결과를 보고했다.나는 노 대통령에게 올해 안에 한 소 수교가 수립될 것이며, 노태우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정상회담도 이루어질 것같다고 말했으나, 노 대통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