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매일 통화해서 보고를 듣는데 나쁜 소식뿐이었다. 사실은 내가 입당해서 신민당을 지도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미국 조야 사람들이 왜 신민당에 안 들어가고 원외의 비합법단체를 가지고 개헌 운동을 하려 하느냐고 물어서, "아니다. 나는 의회주의자고 정당을 통해 개헌 운동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돌아가는 대로 그럴 작정이다."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이 부풀려서 전해진 것같았다.
김대중 씨는 나의 미국 발언을 반박하듯이 신민당만이 민주화운동의 전체 세력은 아니라는 말을 했다. 김대중 씨의 새 집이 완성되었는데 집들이 형식으로 이민우 총재를 초청해 속깊은 얘기를 나누었다는 말이 널리 떠돈다. 이민우 총재는 기자들에게 아마 김영삼 씨 단독 입당은 말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보고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서울에다가 그런 확인 안되는 보고는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왔더니 민추협 황명수 간사장이 동경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귀국하는 공항에서 상임 고문 수락을 발표한다는 터무니없는 얘기 때문에 보낸 것 아닌가 짐작만 했다.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당인데 내가 들어가는 것을 반대한다니 마음이 상했다. 내가 당권을 바라서도 아니고 개헌 운동하려고 들어가는 것인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보내 이 총재가 내 입당을 능동적으로 제기하겠는가를 알아봤다. 이 총재 말이, "그러고 싶지. 그런데 동교동 사람들이 반대여.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오는 건 그 분을 위해서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동경으로 황명수를 보내기까지 했는데 …" 라더라는 것이었다.동교동 쪽에서 지금도 당의 주도권이 상도동 쪽에 있다 해서 사사건건 견제를 하는데 내가 입당까지 하게 되면 견제가 더 심해질 것을 이 총재는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고, 마침 정기 국회가 개회되어 있으니 개헌 문제는 국회 논의를 지켜보기로 하고 입당을 미루기로 했다.
해가 바뀌어 1986년 1월 나는 이제 입당이 더 이상 미룰 일도 눈치 볼 일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개헌 운동은 제자리걸음이고 신민당과 연대해 있던 재야나 학생들은 희생만 당하고 이제는 신민당 의원도 19명이나 검찰에 입건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1월 중순께 셋이 모인 자리에서 이대로 밀리다가는 개헌도 안 되고 신민당의 단합도 흔들릴지 모르겠다. 내가 들어가서 돌파구를 열어보겠다고 의논이 아니라 입당 통고를 했다.
두 분 모두 반대를 안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날로 입당한 것은 아니고, 다만 입당 준비를 했다. 입당 통고를 하고 2월 8일의 입당까지 약 3주간인데 그 기간 근 2백명을 만났다. 개헌 운동을 시작할 테니 협조해 달라고 통보도 하고 그분들의 지혜도 구했다. 내가 입당을 한 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다면 당국은 반드시 주목해 면담 내용을 알아내려고 했을 것이다.그러나 입당도 안했고 시기적으로 정초고 해서 무심하게 넘긴 듯했다. 내가 입당하고 2.12 총선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개헌 서명을 시작하던 때 같은 시간 민추협에서도 서명을 시작하고 있었고, 각계 민주운동 단체도 시작하거나 시작할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개헌 운동은 고된 행군이었다. 공권력에 밀리고 최루탄에 눈물 흘리고 닭장차에 실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