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많은 국민을 상대해야 하는 정치인에게 있어서는 약속과 신의는 생명보다 중요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어제 한 말을 다음날에 뒤집고 불과 며칠 전에 여럿이 모여서 합의 한 사항을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딴전을 부린다면 어찌 그런 정치인을 믿고 국민이 따라갈 수 있겠는가.우리 국민들을 가리켜 건망증이 심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선거 때 다급해서 표를 얻기 위해 한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난 경우를 흔히 보아왔기 때문에 정치인의 말과 약속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진지한 자세가 정치인의 빼놓을 수 없는 덕목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미국 정치에 있어 가장 중시되는 것은 정치인의 언동에 관한 일련의 기록이다. 국회에서 언제 어떤 발언을 했고 법안의 표결 때 어느 편에 섰느냐는 기록은 두고두고 그의 정치생명에 영향을 미친다. 또 선거 때 행한 공약이나 발언은 끝까지 그 정치인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남는다.그러기에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도 않거니와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다고 한다.
나 자신 오랜 정치 생활을 해왔으나 솔직히 말해 모든 약속을 제대로 다 지켰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다만 열심히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는 사실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만날 시간을 약속하고 정해진 시간에 회의나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처럼 불가항력적인 교통지옥에 갇히는 특수한 경우를 빼놓고는 거의 어김없이 약속시간을 지킨다. 통일민주당의 회의는 거의 1분이라도 늦게 열리는 법이 없다. 나 자신이 회의 시간 전에 반드시 도착해서 좌정을 하기 때문에 당 간부들이 거의 어김없이 시간을 맞추는 것 같다.
사실 시간을 잘 지킨다는 것은 모든 약속 이행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내 체험으로 볼 때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은 다른 약속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도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이라는 약속론을 강조하신 바 있다.따라서 시간 약속을 지키는 일부터 책임감 있게 해내는 것이 큰 일을 실수없이 이행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 사회에도 앞으로는 좀더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그런 관행이 뿌리내렸으면 싶다. 만일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언행을 낱낱이 기록해두었다가 반드시 그 실천 여부를 따지고 넘어가는 일이 관례화되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직하고 깨끗한 정치풍토의 정착은 백년하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89년 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