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시민항쟁은 그 결과로 보면 좌절과 비극이었지만 그 내용으로 보면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 국민적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준 장엄한 시민운동의 결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3월 30일 신민당 개헌 추진과정 중 광주 금남로 한복판에서 또다시 뜨겁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광주시민항쟁은 지금 민주화의 현장에서 되살아나고 있으며 민족사에서 새롭게 부활할 것입니다.광주시민항쟁은 또 그 과정을 통하여 이 나라 국민의 시민의식과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총기가 시민들의 손에 있었는데도 강도, 절도가 없었고 은행의 금고와 농협의 쌀 창고가 시민들에 의하여 훌륭하게 지켜졌습니다. 식량이 공급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매점매석이나 폭리를 취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외국인도 찬탄을 금치 못하는 이렇게 훌륭한 광주시민이 어떻게 폭도일 수가 있습니까.
또한 광주시민항쟁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동포애를 보여준 서사시였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먹었고,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였을 때 다투어 헌혈한 피가 남아돌아갔습니다. 부녀자들은 시민들에게 스스로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배고파하는 군인들에게도 먹을 것을 제공하는 데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이른바 치안 부재의 10일, 곳곳에 흩어진 돌멩이, 유리, 최루탄 파편을 쓸어내는 시민들, 총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간호했던 의사와 간호원들, 생명을 내어맡기고 젊은이를 보호했던 운전사들, 약탈과 파괴와 방화를 하지 말자며 만류하던 광주 시민들, 그 마음 속에는 동포애의 뜨거운 숨결과 내 삶의 터전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그날 광주는 위대했습니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하는 한 광주시민항쟁은 끝난 것이 아니며, 그날의 대치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광주시민항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그 6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쿠데타에 의해서 5.17과 같은 전반적인 상황이 재연되었을 때 우리는 전 국민의 봉기와 함성으로 그것을 물리칠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상가의 철시와 사업장의 파업, 공무원의 부당한 지시에의 거부, 시민 불복종 운동의 전개, 시민궐기 등 가능한 모든 평화적 방법을 동원하여 군사적 폭력을 막아내고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주 시민항쟁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깨달음이요, 얻어내야 할 교훈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이 날을 경건한 마음으로 되새기고 기념하는 진정한 이유는 다시는 이 땅의 어느 한구석에서라도 그같은 만행과 비극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성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광주시민항쟁의 과정에서 숨져간 외로운 넋들에 보답하는 길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우리의 힘으로 창출해 나가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5월 18일은 1년마다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채찍질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광주시민항쟁의 의미와 아픔을 뼛속 깊이 되새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광주시민항쟁과 그 결과는 이 민족의 십자가입니다. 나는 그것을 막지 못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그 책임을 언제나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83년 5월 18일 나는 '5.17 군사쿠데타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 부정당함은 물론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백 수천 명의 민주시민이 광주에서 무참히 살상 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한 자책과 참회'(단식 성명)을 위하여 생명을 건 단식투쟁을 결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나는 23일간에 걸친 죽음을 넘나드는 단식투쟁 속에서 오직 광주시민항쟁의 희생자들이 겪는 고통과 민주주의를 위해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청년 학생들의 항쟁을 연상함으로써만 단식에서 오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단식투쟁과 연계하여 전개된 함석헌, 문익환, 김철 선생을 비롯한 이 나라 민주 지도자들의 동조단식과 김대중 의장을 비롯한 국내외의 지원투쟁은 이제 꺼져가는 민주화투쟁을 기사회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국내외의 빗발치는 격려투쟁과 단식 중단 호소 그리고 현정권의 비열하고도 집요한 단식 방해는 나로 하여금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를 위하여,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몸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으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단식투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투쟁은 나의 단식 중단 성명에서 밝힌 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나의 단식 기간 중 민주세력이 새로이 결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단식투쟁 후 만 1년이 되는 바로 오늘, 5월 18일에 우리는 민주화투쟁의 정치적 모태가 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 발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해 8월 15일 미국과 한국에 떨어져 있던 김대중 의장과 나는 워싱턴과 서울에서 동시에 감격적인 8.15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결의를 담은 이 공동성명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 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 성스런 싸움과 승리의 현장에서 뜨겁게 만납시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의 결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뒤에 우리는 과연 뜨겁게 뜨겁게 만났고 더불어 민주 투쟁의 현장에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김대중 의장 과 나의 바다를 뛰어넘는 연대는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에 바탕이 되었고, 민주화추진협의회는 그 이후 신민당 창당, 2.12 총선투쟁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은 이 땅에 흩어진 민주주의의 불씨를 모아 횃불을 만드는 일이었으며, 신민당의 창당은 그 횃불을 들고 국민 속에 뛰어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선거투쟁 선언'을 시발로 선거과정을 통한 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고 그 선거투쟁은 2.12 총선을 민권의 승리, 민의의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2.12 총선은 이 나라 국민의 민주적 저력이 유감없이 과시된 평화적 민주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국민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성원에 힘입어 실질적인 야당 통합을 이룩하고 이제 개헌 투쟁의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지난 2월 초 내가 신민당에 공식 입당하고 며칠 뒤인 2.12 총선 1주년을 맞은 그 날부터 이민우 총재, 김대중 의장과 본인이 함께 시작한 개헌서명운동은 당국의 가열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요원의 불길처럼 이 땅 구석구석과 사회 각 계층과 분야 분야에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비롯된 민주화 열기는 세계사적인 흐름과 더불어 거대한 분류처럼 이 나라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대학교수, 종교계, 언론계, 교육계, 여성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 흐름을 막거나 거역하는 사람은 이 큰 흐름 속에 휩쓸려가 마침내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현 정권은 이 엄청난 역사의 분류를 구차한 변설과 어물쩡한 속임수로 넘겨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 정권이 역사의 흐름에 겸손하고 진실하게 순응하지 아니하고 명쾌한 태도 표명을 유보하면 할수록 앞으로 자신들이 발붙일 여지가 그만큼 축소되거나 없어진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 순응하여 더불어 함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 정권은 정치범, 민생범에 대한 석방, 정치적 이유로 법률적 제한을 받고 있는 김대중 의장을 비롯한 민주인사에 대한 사면과 복권, 언론통제의 철폐와 자유언론의 보장 등 적어도 이 세 가지만은 선결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합의와 공동인식에의 성의가 구체적으로 표시되지 않는 한, 우리는 현 정권이 민주화를 시대적 소명으로서 인식한다고 결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또한 이 자리를 빌어 민주화투쟁에 동참해준 재야 민주세력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재야 민주세력이야말로 민주화 투쟁의 요람이요 중핵입니다. 이제 민주진영은 민주화투쟁의 완결과 그 마지막 승리를 위해 새롭게 하나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룩할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창의와 참여와 토론을 통한 민주주의적 절차가 철저히 존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석 달 전 2월 12일부터 전개한 개헌 추진운동은 3개월 동안에 이 세상을 놀랄 만큼 바꾸어놓았습니다. 민주주의는 투쟁 속에서만 쟁취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실천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평화적인 민주화투쟁을 통하여 민주화된 평화의 세상을 향해 나아갑시다. 오늘 5월 18일 결코 잊혀질 수 없고 또한 잊을 수도 없는 그날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다같이 경건하게 나와 우리, 우리 조국의 갈 길을 가슴 깊이 헤아려봅시다.
1986년 5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