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으로 몇백 명을 동원해서 한 사람을 감금해 놓아야 유지되는 정권이 용납될 것인가. 나를 집에 감금하는 일에 차출된 것이 너희들 젊은이가 원하는 일도 아닐 것이니 너희들 몸 고생 마음 고생도 안타깝다."
그런 요지로 얘기를 하는데, 그들 중에 눈물이 글썽해지는 젊은이도 있었다.내가 연설을 시작하면 옆집 사람들도 창문을 열고 듣기도 했는데 이렇게라도 한바탕 말하고 나면 답답증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기도 했다. 처음 한 동안은 붓글씨도 제대로 써지지가 않았고, 책을 읽어도 집중이 되지 않아 무엇을 읽었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5-6개월쯤 지나니까 차츰 마음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성경도 위안이 되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구약의 이사야서 41장 10절, 11절을 되풀이해 암송하기도 했다.붓글씨도 잡념을 잊고 마음을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왜 서예를 도(道)라고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연금당해 있던 기간 썼던 글은 나중 연금에서 풀린 뒤 1981년 11월 9일부터 15일까지 부산의 로터리 전시관에서 전시회를 했다. 나의 연금 해제 소식을 듣고 경남고교 동문들이 작품 전시회를 권유했다. 나는 전시회를 한답시고 펼쳐놓을 만한 수준의 글이 아니라고 사양했다. 동문들은 작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만나고 싶어하는 고향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로서 전시회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전시회를 갖는 소견으로 프로그램 자서에 이렇게 썼다.
"외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격리당한 지난 1년을 나는 책과 붓을 상념의 기록으로 해 공허를 메워 왔습니다. 그런 세월의 한 부분을 여기 펴놓습니다. 서도란 본시 쓰는 사람 자신이 그것을 통해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 여기 내놓은 작은 작품들은 다짐이고 내 자신과 만나고 나를 새롭게 하겠다는 수업이었습니다."
전시회에는 98점을 내놓았는데 1주일 기간에 약 3만 명이 다녀갔다.학생 등 청년층과 부녀자들이 많이 왔는데 내 손을 잡고 우는 이도 있었고 용기를 내세요 라는 격려도 있었다.사인도 해주고 기념 사진도 찍는 등 오랜만에 고향의 이웃 등과 따사로운 정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작품은 모두 팔렸는데 수익금은 경남고교 도서관, 부산에 있는 신망애 양로원 그리고 구속 학생들의 사식비로 나누어 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