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 하나하나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 40년 압제로부터 이 민족전체의 부활을 마침내 이루어야 한다는 각오로 86년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민주화 일정의 제시 시한을 86년초로 설정한 것은, 현 정권으로 하여금 2.12총선 민의의 진정한 의미와, 해방 40년의 연대기적 의미를 깨달아 자발적으로 합의를 통한 평화적인 민주화의 현장으로 나오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광주사태 등 역사적 죄업과 더불어 출범한 현 정권의 패배주의와 피해의식을 덜어주고, 나아가 그들이 집권할 때와는 달리 그들이 물러날 때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바라서였습니다. 민주화의 대업을 위해서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고 협의하며 합의할 수 있다는 위대한 전례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우리의 충정은 지금도 한치의 변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 정권은 85년 1년을 총선 민의에 대한 배반과 역모로 일관하더니, 86년초에 들어 개헌 논의 유보, 즉 민주화의 유보를 공공연히 공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와 현 정권에 다같이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헌논의 유보제의와 그에 뒤따른 개헌운동에 대한 폭력적 탄압의 선언은 이 나라 4천만 국민에 대한 일대 협박이며, 구차하고도 해괴한 논리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박탈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닌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 정권 당국자들의 말에서 보다 철저히 유의해야 할 것은, 현 정권이 이미 장기집권의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그 의도를 공개적으로 노정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현 정권의 임기 이후가 되는 89년의 일이 위압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 단적인 예입니다.
86 아시안 게임이나 88올림픽이 국가적 대사임에는 틀림없으나, 스포츠행사가 국민의 협조와 이해 아래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들 스포츠행사가 나치즘 치하의 독일이나 파시즘 치하의 이태리, 그리고 군부독재 아래서의 남미에서와 같이 독재정치에 광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 국민은, 오히려 스포츠 행사를 통하여 나라의 민주화와 화해, 그리고 민족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일대 국민적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의 무표정 위에 치러지는 박제된 올림픽이라면, 그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경기장을 제공하는 것일 뿐, 과연 우리나라와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이 반추해볼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 정권 당국이 말하는 바 정쟁의 중단 제의는 이 나라를 '회칠한 무덤'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며, 이른바 '큰 정치'라는 것은 2.12총선 민의를 작은 정치로 규정하는 정치몰수선언이며, 반민주독재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일찍이 유신 시대에 큰 자유를 위해서는 작은 자유가 유보되어야 한다는 '큰 자유, 작은 자유' 주장을 귀가 따갑게 들어온 바 있습니다. 유신시대의 그것이 긴급조치로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인권을 짓밟고 유린하며, 유신철폐 주장을 탄압하는 논리였듯이, 이른바 큰정치라는 것도 개헌운동에 대한 폭력적 탄압의 강화로 나타나고 있어 긴급조치(緊扱措置)가 오늘에 되살아나고 있음과, 유신독재의 악령이 우리 사회를 지금도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논리인 것입니다.
실질적인 긴급조치는 이미 발동되고 있습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대한 대탄압의 시작과 국회의원에 대한 무더기 기소, 민권 변호사에 대한 업무정지 조치, 재야 민주단체의 개헌운동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 등은 그 구체적인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