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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화합의 길은 열려 있다


그래도 화합의 길은 열려 있다


    이렇게 우리 앞에 산적한 문제들이 놓여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 내부의 화해(和解)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12총선에서 제시된 평화적 민주화의 길이 바로 국민 대화해로 나아가는 길이다. 나는 만약 이러한 국민적 화합의 길이 거부되거나 차단당하는 상태가 86년에도 계속된다면, 보다 치열한 갈등과 불화가 우리 사회와 국민 내부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러한 국민적 화해의 길이나 전망이 제시된다면, 86년은 위대한 한 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86년은 우리 정치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나는 86년이 평화적 합의를 통해 국민 대화해를 찾아 나서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하고 또 소망한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온다고 해서 저절로 새 날, 새 해가 오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날 속에 1년이라든가 새 해라든가 하는 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은 구획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이 그날이요, 그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날은 세월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서양의 어떤 성인은 그 제자들과의 답을 통하여 진정한 새 날은 내 눈에 비치는 사람들이 모두 다 '내 형제'로 보일 때 비로소 새 날이 온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 날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위대한 변화를 일으킬 때 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글에서 본 이 이야기를 구태여 인용하는 것은,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얘기로 인간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 보이고, 동물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와 같은 짐승으로 보인다는 스님의 일화가 있다. 나는 유신체제 이래 우리 사회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미움을 키우고, 미워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며, 미움을 확대하는 과정, 바로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나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을 철저히 미워할 수 있으며, 나의 그 미워하는 마음을 국민에게 납득시키고 확대해 나갈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실행해 나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 미움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다 가혹한 형벌이 연구되고, 공영방송을 통하거나 언론매체를 통하여 같이 미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그 제정이 유보되기는 하였지만 학원안정법 같은 것은 미움을 제도화시킬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보복과 미움의 악례(惡例)가 연구되고, 같은 법정에서 검찰의 구형량이 높아지는 등 미움을 향한 질주가 진행되고 있다. 학생들에 대한 집중포화 같은 비방과 미움에의 선동(煽動)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 인간이 인간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인간성이라면, 억압의 체제는 억압하는 사람이나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다 같이 말살시킨다. 나는 86년에는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미움과 그 미워하는 마음을 도려내고 대신 거기에 사랑과 관용(寬容)을 심어나가는 한 해가 되기 바란다. 그 미움이 거두어지고, 보이는 인간이 모두 다 같은 형제로 보일 때 우리는 진정한 새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나 자신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을 거두어 내려고 노력하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현 정부당국자를 포함하여 정치인,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온몸으로 호소하고자 한다.

    이 미움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화해로 해결할 수도 있다. 그것은 유신시대 이래 싹터 왔고,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미움의 찌꺼기를 청소하는 작업, 곧 모든 정치범의 석방과 사면, 복권도 마땅히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그렇듯이 내가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남이 나를 미워하고 있지 않을까 겁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정권적 차원의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첩경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