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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가 벌이고 있는 1천만명 개헌서명운동은 정치적 화해달성을 향한 국민적 의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호소하기 위한 평화적 운동에 다름 아니다. 극단적인 갈등과 대치를 평화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길은 합의요, 그 합의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헌신적인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국민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이 나라의 정치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와 같은 서명운동을 통하지 않고서도 개헌문제를 비롯한 민주화 문제에 대해 평화적 토론과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면, 환영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서명운동은 그 합의를 위한 것이지, 합의를 외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 사회가 더 이상 타락하지 않을 수 있게 하고, 정치공동체가 무원칙한 독선으로 치달려 난파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도덕적인 힘, 평형을 유지시키는 힘이 없다. 모든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로서의 언론의 자유가 억압되어 있고, 신뢰와 존경을 받을 인사나 집단을 훼절 또는 파괴, 유린시키는 유신체제 이래의 정치적 억압이 청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거나, 규격의 온존과 그 특권을 향유하려는 세력간의 첨예한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급격한 변화와 거기서 오는 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안전판의 기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있다. 우리 국민이 느끼는 위기의식의 실체도 바로 이 안전판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인 것이다. 나는 오늘날 올바른 정치인, 올바른 정치집단이라면, 그리고 뜻있는 국민이라면 그 안전판의 구실을 자임하고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평형유지세력의 존재와 그 역할이 인정되고 배양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파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갈등과 대립의 한쪽 끝이라 할 정부에 대해서도 자기 발언권을 가지며 그 반대편의 끝에 서있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비록 그들의 충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평화적 해결책을 설득하고 제시하는 안전판적 역할이 서있을 수 있는 입지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의 정치상황에서 가능하다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확대되기를 바라거니와, 나 자신이 파국으로의 치달음을 막을 수만 있다면, 거기에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정치상황은 절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늘 우리가 처하고 있는 이 난국을 평화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또 그것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평가되거나, 어떤 수모가 뒤따른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비우고 거기에 달려가고 싶다는 나 자신의 절실한 염원을 밝히는 바이다. 요컨대 나 자신을 저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적 기도처럼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하는 기도를 바치고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호소하는 구도자가 되고 싶을 따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황된 구호와 허구적인 구상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열어놓는 겸허함이다. 이러한 정의의 경쟁, 겸허와 관용의 경쟁이 나타나고 서로 어우러지고 허심탄회하게 이루어질 때 86년의 정국은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 불행한 한 해가 될 것이다. 더불어 같이 인간답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198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