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에서 만사 제치고 서울로 왔다. 분쟁 당사자들은 모두 물러나고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을 총재 권한대행을 맡도록 하는 긴급 처방으로 가까스로 분쟁을 수습해선거를 치렀다. 진중 내란이 있었는데도 국민은 신민당을 버리지 않아 국회의원 선거에서 41석이던 의석을 두 배로 늘렸다. 신문들은 헌정 사상 최초의 균형 국회라고 했다.야당 의석이 늘어난 균형 국회는 야당에도 국정에 대한 책임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는 야당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당내의 화해와 단합을 넓혀나가야 했다. 5.6 전국구 파동의 상처를 회복하고 단합하기 위해서는 지명전에서 경쟁했던 우리들 3인의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김대중 이철승 씨와 만나 우리 세 사람은 당권경쟁에 나서지 말고 김홍일 체제에 협력하자고 제안해 합의를 봤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만들어낸 합의였는데 실천되지 않았다. 유진산계와 김대중계가 5.6 파동의 앙금을 씻지 못하고 끝내 충돌하면서 김대중 씨는 김홍일 씨 지지를 철회하고 스스로 당권 경쟁에 나서고 만 것이다.그로부터 당은 5.6 전국구 파동의 연장전에 시달렸다. 유진산계는 당권 회복에 모든 것을 걸고 준비를 했고, 김대중 씨도 반진산 연합 전선을 만들어 여기에 대항했다. 이 틈새에서 정치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 때 우리 야당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했다. 박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여는 총통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문들이 실제로 있었다. 우리는 박 대통령의 3선을 막지 못하면 평화적 정권 교체의 희망은 아주 멀어질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었다.박 대통령의 3기 집권이 시작된 뒤 심상찮은 징조가 있었다. 검찰이 고분고분하지 않는 판사를 혼내 주려고 일으킨 사법 파동, 중앙정보부가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의 표결권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팬 소위 10.2 파동, 그리고 대통령에게 비상 대권을 주는 국가보위법 파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두 달 간격으로 일어난 이 파동들은 독재로 가는 불길한 수순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