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무성 관리들도 '야당 의원들이 투옥 당하고 있다. 지금 귀국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당분간 이곳에서 사태 진전을 관망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나를 초청한 라이샤워, 코헨 두 교수도 당분간 정세를 관망할 필요가 있다면서 대학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도록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 머물 수 없었다."고맙다. 그러나 내가 명색이 대통령을 맡겠다고 나섰던 정치인인데 나라의 정변을 외국에서 바라보는 방관자가 될 수는 없다. 동지들과 국민이 수난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도 그들과 있어야 한다." 그랬다.
내가 미국을 떠나던 때, 나를 아끼는 미국의 친지들은 나의 고집스런 귀국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미국 당국자도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야당 정치인들 중 몇 사람은 계엄 선포 직전에 서울을 빠져나와 지금 일본에 머물고 있다. 우선 동경(東京)까지 가서 그들과도 연락하고 상황을 본 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했다.나는 동경에서 곧장 서울에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돌아가기로 한 이상 상황을 알아보고 좌고우면(左顧右眄)할 필요가 없었다.김포공항에는 예상했던 대로 계엄군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를 구금하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신문 기자나 기타 다른 정치인과 만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로 집에 안내되고 곧장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정변 앞에 야당이 무력하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1970년 지명대회 이후 2년여 기간 당내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다. 돌이켜보니 우리 야당이 한 것은 국민한테 부끄러운 일들뿐이었다.박 대통령의 3선을 막지 못하면 오늘과 같은 총통제 정변이 온다고 경고했던 야당이다. 그런데 1970년 9월 지명 대회를 하고도 신민당은 곧바로 선거 운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당 총재와 후보 사이에 당권 배분 문제로 3개월을 허송했고 선거대책본부 구성도 대통령 선거 따로, 국회의원 선거 따로따로로 구성했다.
이 때문에 당 일부에서는 대통령 선거보다는 대통령 선거 후의 당권 경쟁에 더 마음을 쓰고 있다는 오해를 우려하기도 했다.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집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지도부에서 일선의 말단 당원에 이르기까지 집권에 대한 확신을 갖고 뛰지 않으면 정권 교체는 신기루일 뿐이다. 그런데 1971년은 너무 오래 방황하고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고 마음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