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민족정기(民族正氣)가 없어진 일은 해방 이후의 역사 전개에 있어 치명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과 민족으로서의 삶에 있어 진정코 바람직한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치의 기준을 말살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정의(正義)의 관념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해방 이후 민족정기를 되살리고자 하는 일이 한번이라도 민족의 이름으로 전개되었던들, 민족의 긍지는 내외에서 이렇게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정의가 매몰되는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제시대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 민족정기의 당연한 표명이었다면, 해방 후에 있어서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것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 민족의 정기를 살리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유린하는 세력에 붙어 자신의 안일을 꾀하는 사람은 득세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는 이 사실은, 한 개인의 불행이기에 앞서, 조국과 겨레와 역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불의(不義)가 정의를, 반민주(反民主)가 민주를, 반민족(反民族)이 민족을, 비양심(非良心)이 양심을 재판하고 탄압함으로서 정의(正義) 그 자체가 파산(破産)되고 있는 것이다. 잘난 자식으로 하여금 못난 자식이기를 바라야 하는 이 슬픈 현실과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