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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공방전 속에 내 이미지 부상


개헌 공방전 속에 내 이미지 부상


    1969년의 3선 개헌안은 국회 제3 별관에서 공화당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세상 사람들은 야당이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개헌안 표결을 방해했기 때문에 별관으로 옮기는 의정사상 최초의 변칙 처리가 기록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당시 나는 개헌안을 당당하게 표결하기로 했다. 승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처음 공화당에서는 40여 명의 의원이 개헌을 반대했는데 집요한 공작으로 마지막에는 공화당에서 제명된 3-4명이 남았다. 야당은 숫자가 줄고 해서 수적으로는 우리 야당이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심의하고 토론하고 할 것 다했는데 표결은 안된다고 하는 것은 억지고 반의회주의였다.물론 당내에서는 표결을 막는 농성을 하자는 주장도 있었고 정보부의 개입 등을 따져 농성에 들어갈 명분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개헌을 막는 길은 아니었다. 그래서 표결하기로 하고 마지막 찬반토론도 했다.

    그랬는데 내가 반대 토론자로 지명한 무소속의 양순직 의원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 오전 본회의에서 두 사람이 토론할 때도 본회의장에 나와 있었고 반대 토론도 하겠다고 했는데 오후 속개된 회의에 그는 나오지 않았다. 양 의원이 반대 토론을 하고 바로 표결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사라져 버린 것이다.그뿐 아니라 갑자기 의사당을 경찰이 포위했다. 개헌안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이 의사당 근처에 몰려들고 있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것이지만 도리어 이것은 공화당 내 반대자의 기를 꺾기 위한 무력 시위였다. 이쯤 되니 야당으로서는 표결에 응할 수가 없었다.

    개헌 주체들이 이렇게라도 해서 별관에서 공화당의 일사불란한 찬성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불안할 만큼 우리들 야당은 잘 싸웠다. 개헌안의 국민 투표 때도 유진오 총재와 나는 전국을 유세했다. 청명한 가을 날씨여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유 총재와 나의 개헌 반대 연설은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공화당의 사전 공작과 국회 심의, 그리고 국민 투표까지 1년 넘게 끌었던 개헌 공방전은 내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맡았던 대변인이나 원내 총무 두 자리가 모두 정당의 얼굴에 해당하는 자리여서 다른 정치인들보다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1년의 개헌 공방은 내 이미지를 국민 속에 뚜렷하게 각인시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