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는 야당에도 손을 뻗쳐 세 의원을 개헌 찬성으로 돌아서게 했다. 이것은 야당의 전열을 교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공화당 내 개헌 반대 세력의 기를 꺾는 데 더 큰 목표를 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의도를 깨기 위해서는 우리 쪽도 대응책을 강구해야 했다. 당시 헌법에는 정당이 해산하면 그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의원은 모두 의원 자격을 상실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 헌법 장치를 이용해 변절한 세 의원의 의원 자격을 상실케 할 것을 제안했다. 세 의원을 제외한 소속 의원을 전원 제명한 뒤 당을 해산했다. 세 의원의 자격을 상실케 한 뒤, 곧바로 재창당하는데 이때는 현재의 지도 체제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나의 구상이었다. 당 중진들이 반대했다.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개헌 투쟁의 한복판에서 당을 해산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만약 공작이 침투해 재창당 때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개헌안 표결을 앞둔 야당 전열에 큰 혼란이 일어날 위험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도부를 설득했다. 의원제명 -> 당 해산 -> 재창당을 1주일에 끝낸다. 정보부가 아무리 공작에 뛰어나다 해도 1주간의 기습작전에 공작을 할 만한 능력은 없다. 국민에게 우리의 결의를 알리고 흔들리고 있는 공화당 내 개헌 반대 세력에 용기를 주기 위해 이만한 모험은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 유진오 총재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니 중진들도 더는 반대를 안했다. 결국 우리는 결단을 내렸고 당의 해산과 재창당을 했었다. 돈과 공을 쏟아넣어 만들어 낸 개헌찬성표를 무효로 만들고 공화당에도 손을 뻗치고 있는 내가 그들에게는 눈에 가시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끝내 내게 초산 테러를 했다.
개헌안이 국회에 발의된 직후인 1969년 9월 초순이다. 저녁 10시쯤 상도동 집 앞 좁은 커브길을 도는데, 세 명의 청년이 길을 막고 있었다. 저희들끼리 싸우느라 길을 막고 있었는데 차가 바짝 다가서자 비켜서면서 두 청년이 동시에 차문을 열려고 했다. 차문은 모두 잠겨 있었고 둘이 동시에 덤볐기 때문에 테러임을 직감하고 차의 속력을 내자 그들이 무엇인가를 던졌다. 나는 수류탄인 줄 알고 엎드렸는데 집에 도착해 확인해 보니 초산병이었다. 초산병은 자동차 뒤편 문짝에 맞아 깨졌는데 중심 부분은 쇠가 타고 초산이 흐른 곳은 칠이 벗겨져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에게 치명상을 가하려 한 테러였다.
나는 테러가 김형욱 정보부장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 무렵 우리 당 의원에게 테러를 예고하는 협박이 있었는데 나는 이를 무시했었다. 나는 다음날 국회 본회의에서 신상 발언을 통해 "김형욱 정보부장이 배후에서 테러를 조종했다. 이 테러의 궁극적인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한테 있다.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고 무모한 독재를 계속하려 하면 다른 모든 독재자가 걸었던 비극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나라도 불행해지고 대통령 자신도 불행해질 이런 일을 하지 말도록 경고한다."고 연설했다. 그 무렵 대통령과 정보부장은 흔히 말하는 성역이었다. 감히 그 두 곳은 공격을 못했다. 그런 때 내가 한 연설은 내외에 상당한 충격을 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