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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출마, 어렵고 고독한 선택


후보 출마, 어렵고 고독한 선택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기로 한 결단도 어렵고 고독한 선택이었다. 사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는 나의 목표는 아니었는데, 갑작스런 상황 변화가 나로 하여금 결심을 하게 했다.

    나는 지명전 선언에서 빈사 상태를 헤매는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야당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나선다고 했다. 이 성명은 나의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한 대목이다. 당시 우리들의 과제는 박 대통령의 3선을 막는 일이었다. 우리는 3선 개헌안을 부결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는 개헌 저지 투쟁에서 당의 힘을 합쳤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3선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는데 잠재적 대통령 후보였던 유진오 총재가 개헌안 국민 투표가 막 끝난 10월, 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유 총재의 와병은 선거를 어둡게 했다. 유진오 총재는 대통령 후보로 모셔왔던 분이다. 1967년의 일인데, 민중당은 통합 야당이기는 했으나 마땅한 대통령 후보가 없었다. 그래서 의논 끝에 유진오 씨를 모셔오기로 했고, 그 교섭을 내가 맡았다. 그랬는데 196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다시 통합이 되어 후보는 윤보선 씨가 맡고 유진오 씨는 총재를 맡았다. 1967년 선거에서 실패한 뒤 윤보선 씨는 은퇴했고, 유진오 씨는 당 총재이면서 유일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 내정자이기도 했다. 이 과정이 말해주듯 그때 야당에는 유진오 씨 말고 마땅한 대통령 후보가 없기는 4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야당의 원로나 중진 중에는 대통령 후보가 갖추어야 할 대중적 지지 기반을 가진 이가 드물었다. 예를 들어 수석 부총재였던 유진산 씨 같은 이는 당내 기반은 확고했고, 지도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이미지가 나빠 후보를 맡기가 어려웠다. 유진오 씨가 물러나면 총재로는 유진산 씨가 제1의 후보였지만 대통령 후보로는 적격이 아니었다. 적어도 박 대통령과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외에서 모셔올 만한 후보감도 없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세울 만한 마땅한 후보가 없을 때 정당은 활기를 잃는다. 1969년 겨울의 신민당이 그런 모습이었다. 더욱이 그 해는 3선 저지라는 특별한 목표가 있었다. 박 대통령의 3선을 막지 못하면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많았다. 그런데 3선을 막을 자신감을 잃게 되니 당은 금세 기력을 잃었다. 개헌투쟁을 통해 만들었던 단합과 활력이 패배감과 무기력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당시 원내 총무로 3선 개헌 반대운동을 주도해 온 나로서는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을 골똘히 했다. 대통령 선거는 3선 개헌 반대 투쟁의 연장선이고 나는 개헌반대 투쟁을 총재와 함께 둘이서 이끌어 왔는데, 총재가 병으로 주저앉게 되었으니 내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선배 중진 중에 마땅한 후보도 없고 상대적으로 보아 내가 그들보다 나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