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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空約)에 그친 공약(公約)


공약(空約)에 그친 공약(公約)


    군사 쿠데타 세력은 화려하고 매력적인 공약 6장을 발표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주의로 삼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러한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내외에 밝혔다. 그 후에 그들은 민정 이양의 시기를 1963년 8월로 공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변질시켜버렸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주의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구실 밑에 합법적인 질서 하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혁신세력을 과잉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집단투옥함으로써 오히려 국민의 단결로써 갖추어야 할 반공 태세의 본질을 전도시켰다.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라는 말은 '부패와 구악을 일소(一笑)에 부치고'로 변질시켜버렸다.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유행어가 그것을 말해준다. 4대 의혹사건, 제2의 4대 의혹사건이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5.16 정신을 계승했다는 현 집권세력이 저지르는 가지가지 부정부패는 도저히 '구악을 일소한다'는 말을 그들의 입에 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고 했던 그들은 그나마 기아선상에라도 매달려 있던 민생고를 기아선하로 낙하시켜버렸다. 2년 7개월의 군정이 끝나고 민정이 수립된 첫해의 연두교서에서, 국민들에게 박대통령은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호소했다. 2년 7개월간 거침없는 권력을 휘두르고도 민생고를 완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하기에 "이제는 허리띠를 늦추라"고 해야 할 시점에서 또다시 "허리띠를 졸라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5개년 계획의 실패, 고리채 정리의 실패, 통화개혁의 실패, 식량파동, 사상 유례없는 물가고 -- 이 엄청난 실정들을 그들은 철면피하게도 '의욕과잉'이니 '시행착오'니 하는 미사여구로 변명했다. 조국 근대화니 경제 재건이니 하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세우고 밀고 나가는 그들의 경제정책이 어찌하여 그렇듯 부익부 빈익빈의 방향을 지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 중산계급을 몰락시키고 대기업가들만 비대시키는 특혜경제가 과연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는지 더욱 민생고를 악화시키려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모든 공약(公約)의 위반 중에서도, 정치적 공약을 위반한 것은 국가의 위신을 세계 앞에 가장 충격적으로 떨어뜨렸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한다'는 공약은 가장 대표적인 허구였다.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앉을 자리에 그들 스스로가 앉아버렸다. 소위 정치정화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묶어놓음으로써 양심적 정치인이 자랄 수 없는 정치불모지대를 만들어놓고 자기들은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정권의 자리에 앉기 위한 수속절차를 밟기에 바빴다. 상대방은 발을 묶어놓고 자기들 일방적인 경주를 하고도 겨우 참신하고 양심적인 세력이 앉아야 할 자리에 선착할 수 있었다.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공약을 한 번만 위반한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위반했다. 2.27 선서로 민정불참을 선언했다가 3.16성명으로 군정 연장을 선언했다가 4.8 성명에서 다시 선거를 예고하기에 이르기까지 번의(飜意)의 희극을 연출했다. 이러한 정치행상은 이 나라의 위신을 세계 만방에 추락시켰다.

    이와 같은 거짓에 찬 정치 행적은 대외적으로는 나라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대내적으로는 국민에게 불신풍조를 일으켰다. 세대교체니 체질개선이니 하는 구호로 정치인들을 분열시켰고 병역미필자를 지나치게 몰아치고 군인 우선정책을 취함으로써 군인과 민간인을 분열시켰고 야당에 사꾸라 전략을 애용(?)함으로써 야당 내부를 분열시켰다. 이

    설의 수단으로 비정상적인 지름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5.16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가장 값있는 가치이다.

    지난 해 나는 해외 여행을 하면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도 번영하는 나라들을 많이 보았다. 공산주의와 같은 극단의 독재적인 수단으로는 자유민주주의 방법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베를린에서 볼 수 있었다. 몇년 전 고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자유를 알고 싶은 사람은 베를린에 와보라. 민주주의를 알고 싶은 사람은 베를린에 와보라. 자본주의를 알고 싶은 사람은 베를린에 와보라"고 했던 의미를 현지에서 더욱 실감있게 느낄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의 망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현저한 외관상의 차이에서 벌써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승부를 판단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서베를린은 완전 복구가 되어서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지만 동베를린은 아직도 2차대전 때의 파괴된 자리가 그대로 보이기까지 했다. 서베를린은 살아 있는 도시였고 동베를린은 죽음의 도시였다. 베를린은 독재적 수단이 국가건설에 있어 민주적 수단에 앞서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쇼윈도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흔히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맞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소위 행정적 민주주의니 민족적 민주주의니 하는 불투명한 사상이 나왔고 그것이 5.16쿠데타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듯이 선전했다. 그러나 서구식 방법 아닌 독재적 수단으로 2년 7개월 군정을 해도 아무것도 해놓지 못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전후 서독이 민주적 방법으로 잿더미 속에서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일본 또한 같은 방법으로 '신무 이래의 경기'를 노래할 수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이 길만을 지켜야 한다. 조국 근대화와 국가건설이 총부리나 계엄령이나 포고령 정치로 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 앞에 증명된 현시점에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민주주의를 지켜서 이 궤도 위에서만 이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철학으로 삼아야 한다. 다시는 이 땅에 헌정의 궤도를 무너뜨리는 비극이 재연되어서는 안된다.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왔든지 오늘의 헌정 질서는 다시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든 국민이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5.16이 이 나라 헌정을 10년 이상 후퇴시켰다. 또다시 쿠데타가 나면 헌정은 다시 20년, 30년 후퇴할 것이다.

    오늘에 사는 우리는 이 나라의 헌정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 놓는 것만이 역사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그것은 또한 5.16에 바쳤던 너무나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되찾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