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DP는 1848년의 독일민주혁명 때부터 서남독일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있는 정당으로 전후 초대 당수 호이스는 대통령으로까지 추대된 인물이었다. 1960년 1월이래 멘데가 당수가 되었다. FDP는 기본적으로 CDU와는 같은 보수당이며 자본주의적 정당이다. 정책이나 이념에 있어서 큰 차가 없다. 이것은 정당으로서의 존재이유가 희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FDP는 전후 총선거를 할 때마다 당세(黨勢)가 쇠퇴하였으며 정계는 기독교민주동맹과 사회민주당의 2대정당제의 방향으로 개편해 가서 한때는 서독 특유의 선거제도의 하나인 5조항의 벽에 걸려 정당으로서 소멸될 위기에 부딪쳤던 일까지 있었다. 이로 인해 FDP는 항상 자기의 존재를 분명히 명시함으로써 CDU의 거대한 영향력 속에 빠져버리지 않으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FDP는 외교정책면에서 특히 독일문제에 있어서 대담하게 CDU보다 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색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멘데 당수는 FDP를 '독일재통일을 위한 기관차'로 만들 것을 염원하고 있으며 이로써 그는 전독일문제상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63년 12월 크리스마스 때 동서베를린 통행에 관한 협정을 체결할 때도 멘데 당수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교섭했던 것이다. 최근에도 그는 동서독접촉 확대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멘데의 이와 같은 정책은 일방적으로 동독을 사실상 승인하는 문제로까지 연결되어 갈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독정부 내지 다수여당인 CDU는 접촉강화가 동독의 '지위향상' 또는 사실상의 승인으로 이끌고 갈 위험이 있다고 하여 위험시하고 있다. 동서베를린 통행증 협정이 작년 12월에 성립은 되었으나 그 다음 회기에는 쉽사리 합의되지 않아 동서베를린 방문이 1회에 그치고 있는 것도 동독정권의 지위향상 또는 사실상의 승인에 연결되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룬도싸워가 FDP가 그 집행부안으로서 동서독통상위탁기관을 '전독연락기관'으로 개조할 것을 주장했다고 보도하자 제1여당인 CDU는 강력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특히 CDU의 어느 일파에서는 FDP의 주장을 '위험한 모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일파의 지도자는 전 외상 브렌타노인데 그는 1962년 연립정부에 FDP가 참가하게 되자 FDP의 참가에 의해 서독정부의 정책이 위험한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많으므로 책임을 지기 싫어 입각할 것을 거부했다는 설까지 돌았다.
탄력성 있는 외교를 지향하는 에르할드 수상이나 슈레더 외상은 지금까지 대동독정책이나 할슈타인 원리에 관해서 아데나워 시대와 똑같이 강경할 뿐 일보의 후퇴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CDU가 즉각 위 보도에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CDU의 연방의회 원내부총무 윌 라스 씨는 8월 24일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발표했다.
| 1. | 동독과 접촉을 위해 전독일 연락기관을 만드는 데는 명백히 거부한다. 이것은 동독이 제창하는 두 개의 독일론을 합리화시켜주는 것이다. |
| 2. | FDP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멘데 부수상이나 FDP 원내총무나 누구도 지금까지 전혀 시사한 바 없다. |
| 3. | FDP와의 연립상태는 호조(好調)이다. 그러므로 CDU는 여기에 태도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
| 4. | SDP(사회민주당)도 1958년 이와 비슷한 연락기관을 두자는 제안을 했으나 이를 의제로 다루는 것조차 거부한 바 있다. 그 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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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데 당수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FDP의 대동독정책의 골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현재의 동서독일 통상위탁기관의 구성은 벌써 실제 필요에 적합치 않다. 이것은 앞서 베를린통행증을 위시한 교섭, 상호간의 법률적 원조에 관한 변호사의 접촉, 철도우편 등 기술적 문제, 사레교 재건교섭을 통해 명백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이 기관을 개조해서 전독일문제성 밑에 둘 것을 제의한다. 독일문제성이 중앙기구로 존재하는 이상 전독일 접촉을 강화하기 위해 약간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사레교 재건협정의 경우도 정치적 조정이 필요했으나 전독일문제상이 교섭에 가담되지 않았다. 또 협정조인 전에 협정문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신문에 보도된 독일문제 시안은 비밀문서도 아니며 전혀 개인적인 시안에 불과하다.'
멘데의 이와 같은 기자회견으로 1964년 여름의 독일문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에르할드 수상은 멘데 부수상의 제안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지만 서독과의 비정치적인 접촉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은 틀림없다. 경제적으로 부흥을 달성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서독사람들은 양쪽을 갈라놓은 장벽에 얽매이지 않고 동족으로서의 의식을 잊지 않고 있으며 통일에 대한 문제도 이러한 바탕 위에서 자유롭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현실에 민감한 그들은 동독과의 접촉을 계속하면서도 그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는 자제력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