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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민의원


최연소 민의원


    돌이켜보면 내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게 된 인연은 창랑 장택상 의원을 보좌하면서 부터였다. 장택상 의원은 일찍이 영국의 명문 대학 에딘버러 출신으로서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엘리트였을 뿐 아니라, 식견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비록 오늘에와서 돌아볼 때 그분은 한국 근대 정치사에 많은 여운을 남긴 냉전 시대의 정치인으로서 그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나는 당시 그분의 정치 현장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내 나름대로 정치역량을 다듬었다.

    그러나 내가 장택상 의원의 보좌역을 할 때(1951-1953)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권은 있었지만 피선거권은 없었다(나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25세가 되어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그해 5월 20일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할 것을 결심하고 선거구는 내가 태어나 자라난 거제군을 택했다. 비록 나이가 어리고 정치적 경륜과 사회적 기반이 국회의원의 꿈을 이루기에는 미숙했지만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용기와 신념만은 가득했었다.

    한가지 다행한 점은 내가 국회 부의장(장택상 의원)과 국무총리의 비서관을 역임하는 가운데 고향 거제 일원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부상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선거일이 공고되고 후보등록이 임박한 어느 날 나는 아버님을 찾아 뵈옵고 출마하겠다는 뜻을 말씀드렸다. 느닷없는 제의를 받은 아버님께서는 "아직 어린 것이 무슨 입후보란 말이냐?" 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당연한 말씀이셨다. 아버님의 마음에는 아직 내가 어리게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소신을 가지고 아버님을 설득했다.

    이런 아버님의 고집도 "내게 저런 아들이 있으면 집을 팔아서라도 뒤를 돌봐주겠다"는 아버님 친구들의 권유와 어머니의 응원에 결국 아들의 후원자가 되셨고 그리고 이런 관계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평소 다져온 사조직이 큰 힘이 됐다. 경쟁자는 변호사 출신의 서순영 씨(민국당 공천)와 이채오 씨(무소속) 등이었다. 상황은 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투표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날 나는 당시 세도가 당당하던 자유당의 이기붕 총무부장으로부터 한번 만나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제3대 선거부터 최초의 여야 입후보 공천제가 실시되었으나 자유당에선 거제 지구의 공천을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자유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원내 3분의 2선인 개헌선을 확보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3선의 길을 터놓으려고 분망하던 차였다. 이 때문에 전국 몇몇 미공천지구에 대해선 선거운동의 진행상황을 주시해 가며 무소속 입후보자를 포섭하는 전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유당 입장을 꿰뚫어보고 있던 나로서는 이기붕씨의 교섭에 선뜻 응낙(應諾)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뜸을 들이던 끝에 일단 한번 만나본 다음 결론내리기로 다짐하고 상경했다. 우선 자유당 당사 지금 농협 자리에 들러 기다리던 이기붕 총무부장을 만났다. 이기붕씨는 내가 국무총리 비서로 있을 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던 구면이었다. 그는 비교적 조용하면서도 다정한 인상을 풍기는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상한 대로 나를 만나자 목적부터 털어놓고 자유당에 입당해줄 것을 권유해왔다. 그의 집요한 권유 앞에 나는 묵묵부답으로 얼마 동안 망설였다. 비록 내가 정치에 대망을 품고 출발했지만 아직까지 어떤 정당에도 입당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당인이 된다는 것이 어쩐지 선뜻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내 선거구의 유권자들과 운동원들이 내 입당을 권유하는 유인물과 전보를 자유당 중앙당사에 상당량 보냈고 무소속이란 애매한 점이 내 입장을 조여왔다. 여러모로 생각해도 나에게 주어진 길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었다. 우선 피치 못한 입장의 하나가 당시 정당은 오직 자유당과 민국당 단 둘뿐이었는데 내가 앞으로 정당정치의 길을 원칙으로 한다면, 선택의 여지는 오직 둘 중에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이미 그때 나는 정당정치에 관해 확실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무소속 정치인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모름지기 민주시대를 추구하는 정치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정당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우선 정치는 조직의 중요성이 따르는데 조직은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한시적인 존재지만 정당은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정당이 열 개의 정권이나 백 명의 정치인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그리고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들 정당이 얼마나 많은 정권을 창출했으며, 조국에 이바지했느냐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접해 있던 나로서는 차선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지만 그래도 집권 여당에 입당한다는 것이 선뜻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이기붕 씨의 끈질긴 권유를 냉정히 뿌리치고 다시 선거구로 내려왔다. 그리고 선거운동 참모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 문제를 시종 진지하게 토의한 결과 역시 자유당에 입당하자는 주장이 10대 2로 우세했다. 그 외에 지방 유지들까지도 나의 입당을 강력히 권유해 왔다. 그리하여 선거일을 불과 수일 앞두고 자유당에 입당하였으니 그것이 내가 자유당 의원으로 있어야 했던 7개월이란 짧은 기간의 시작이었다. 아무튼 무소속 후보로 등록하여 투표할 때는 자유당 공천 후보가 됨으로써 생전 처음 정당인이 된 셈이다.

    선거열전이 막판에 이르자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이 몰아닥쳤다. 그러나 나는 진인사 대천명의 자세로 최선을 다했다. 한편에서는 왜 고무신 한 켤레도 구경할 수 없느냐는 등 유혹이 잇따랐지만 그 때마다 나는 대도를 가는 사람의 의연한 마음으로 대처했다. 운동원들 역시 나를 이해하는 것만큼 능력껏 유권자들에게 득표 설득을 폈다. 혼신의 격전 끝에 투표함을 개봉한 결과 나는 2만7백70표를 얻어 1만4천1백10표를 얻은 민국당 서순영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사상 최연소(만 25세) 국회의원이란 영광을 안고 정치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나는 최연소 국회의원이란 화제의 주인공이 되면서 한동안 뉴스의 각광을 받았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나와 같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한결 꿈을 부풀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내가 당선된 지 꼭 19일째 되던 날(6월 9일)이었다. 이날 나는 이기붕 씨의 안내로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3대 국회가 소집되자 자유당 초선 의원들을 경무대로 초청하여 다과회를 베푼다는 것이었다.

    이날 이기붕의 안내를 받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안내자 이기붕 씨와 김철안, 김상도 의원 네 사람이었다. 나는 한 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는 경무대를 국회의원이 되어 처음 들어간다는 점과 국회의원 신분으로 대통령을 만난다는 의미에서 무엇인가 분명히 뜻있는 만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국민의 솔직한 소리를 들어야 하고, 국회의원은 국민의 진실을 구현하는 것이 그 본연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확연히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