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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3선 개헌은 안됩니다


박사님 3선 개헌은 안됩니다


    1954년 자유당은 국민의 열화같은 여론은 무시한 채, 이승만 대통령의 연임을 위한 3선 개헌 공작을 분주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비록 정치적 연륜이 짧고 식견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자유당은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헌법을 마구 뜯어고쳐서까지 특정인의 집권연장을 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어 민주주의 원칙에 크게 어긋난다는 점을 나는 내심 새기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이대통령을 만나게 되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박사님, 3선 개헌을 해서는 안됩니다. 대통령은 이번만으로 끝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민족의 영원한 대통령으로 남으셔야 합니다" 하고 솔직하게 국민의 뜻을 있는 그대로 당돌하게 건의했다. 그 순간 이대통령의 안색이 싹 변하면서 안면의 근육이 실룩실룩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지그시 깐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일행을 뒤로한 채 응접실 뒷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함께 방문한 의원들의 안색이 갑자기 백짓장처럼 변했다. 특히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기붕씨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숨을 죽인 낮은 목소리로 "김의원, 돌았어? 왜 그런 말씀을 함부로 드려!" 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경무대를 나올 때 일행 모두가 나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풍겼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크게 불쾌했다. "도대체 나를 뭐로 취급하는 거야!" 하고 혼잣말을 했다. 이대통령이 국가의 원수로서, 연세와 경륜이 많은 독립투사로 국민의 칭송을 받는 어르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 당신의 입장일 뿐이고, 나는 비록 나이 어린 정치 초년생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뽑아 보낸 국회의원이 아닌가.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격식을 갖춘 공식 회합은 아니지만 국회의원이 행정부 수반에게 국민의 뜻을 밝혔으면 가부간에 경청이라도 하는 것이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권위에 대한 간섭이란 선입견으로 화를 내고 돌아서 나가버린 이대통령의 태도에서 크게 무시당했다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이날 경무대 분위기에서 대통령의 개헌 의지를 직접 확인하게 되었으며 그후 국회가 개원되자 개헌 정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한껏 무르익어 가는 자유당 개헌 분위기 속에서 많은 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헌반대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원내에서 비교적 뜻을 같이하는 현석호, 한동석 의원 등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개헌 저지를 위한 동지 규합에 앞장섰다. 우선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가 있어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수시로 바꿔야 했다. 때마침 한동석 의원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자 문병을 구실로 그곳에서 수시로 만나 밤늦게까지 대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자유당 내 동지의원 가운데 20여 명이 뜻을 같이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나라 선거 사상 정당 대결이 시작된 것은 역시 제3대 국회의원 총선 때부터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여야 후보간의 정책대결이기보다는 주로 인신공격이 더 많았다. 야당은 여당에 대해 정책으로 도전하기보다는 주로 집권 여당의 비정(秕政)을 성토했고 여당 역시 정책제시보다는 이승만의 업적을 과시함으로써 내용이 없는 권력투쟁으로 점철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선거 이슈로 부상된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야당인 민국당은 주로 이대통령의 독선과 장기집권의 폐단을 분쇄해야 한다는 공격이었고, 여당인 자유당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업적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통치능력을 내세웠다. 따라서 자유당의 주장 뒤에는 이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한 3선 개헌 의지가 상당히 깔려 있었다.

    이와 같은 개헌 동기와 목적을 뻔히 알고 있던 나로서는 경무대 방문 시에 3선 개헌의 부당함을 강력히 건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정임과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 자신을 위한 고언(苦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건의가 전연 성의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면전에서 무안을 당하자 나는 큰 결심이 생겼던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고 카리스마적인 존재가 되어 자기의 말이 곧 법률인 양 헌법을 마구 뜯어고쳐서,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분에게 국가의 통치권을 더 이상 맡길 수 없다는 결심이 새삼 굳어졌다. 그리하여 내가 소속되어 있는 자유당에서 3선 개헌 공작이 집요하게 진행되었지만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냉소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자유당에서는 개헌지지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관제시위를 부추기는가 하면 막대한 자금을 뿌려가며 여론 조작과 무소속 의원을 포섭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유당 지도부의 이같은 개헌공작에 맞서 개헌 반대에 나선 의원들도 이때 열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당시 반대 세력의 구심점을 이룬 사람들이 바로 나를 포함해서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등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거물급 인사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당내에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유당 의원들을 포섭해 개헌 전략에 대처해나갔다.

    나는 이미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독선과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정부패의 척결이 없이는 정권은 물론 국가의 장래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헌법에 명시된 대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것만이 문제의 난국을 해결하고 민주정치 구현의 첩경이란 신념을 유감없이 피력했다. 내 일신상의 안위나 영화보다는 나라의 장래를 우선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봉쇄하는 개헌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자유당은 원 내외에서 들끓는 여론을 무시한 채 초대 대통령에 한해 헌법상 3선 제한의 조항을 폐기하고 무제한 입후보의 길을 터주자는 개헌안을 1954년 1월 27일 국회에 제안하고야 말았다.

    이 치졸한 개헌안을 상정해놓고 여야간에 치열한 찬성과 반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국회는 11월 27일 오후 4시 20분부터 개헌안에 대한 무기명 비밀투표에 들어갔다.

    오후 6시 30분에 투표가 끝나자 즉시 표결 결과가 집계되었다. 이 때 사회를 맡은 최순주 부의장이 검표위원으로 투표 결과를 받아들자 난감한 표정으로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총 투표수 202표 중 가 135표, 부 60표, 기권 7표로 한 표가 부족해서 이 개헌안은 부결되었다"고 엄숙히 선포했다. 이 순간 야당 의석에서는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그런데 이날의 국회의 표결 결과를 보면 자유당의 의석 수는 137석이었다. 그 중에 12명이 반기를 들었는데도 135표가 나오게 된 표결의 결과분석은 이러했다. 나와 더불어 자유당에서 반기를 든 의원은 민관식, 현석호, 김두한, 이태영, 황남팔, 한동성, 김홍식 의원 등 소장파 의원 12명이 반대표를 던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까지 겉으로는 야당성을 빙자해온 무소속 동지회에 속해 있던 임홍순, 박재홍 의원 등 10명이 국민의 눈을 속이고 찬성표에 가담함으로써 기회주의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은 1표가 부족해서 부결되었던 것이다. 이 때 나는 초선 의원으로서 온갖 유혹과 위협으로 구축된 개헌작전과 맞서 반대의원을 이끌어온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오류를 돌이켰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이것이 또한 나의 의회활동 첫 수확이란 점에서 감회가 컸다.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국민을 대신한 국회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결로 선포된 개헌안이 어떻게 된 셈인지 해가 지자 괴상망측하게 새로운 사태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날 밤 경무대로부터 번복 지령이 하달됨과 동시에 정부의 갈홍기 공보처장이 느닷없이 135표로 개헌안이 가결된 것으로 인정한다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자 다음날 일요일을 틈타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이미 부결처리된 개헌안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정부의 설명인즉 개헌안 표결내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즉 찬성 135표를 사사오입하면 부결이 아닌 가결이란 것이었다. 재적 투표수 3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 되므로 135의 가표를 얻은 개헌안은 가결이라는 기상천외의 수학공식을 들고나왔다.

    이상의 논리를 들어 자유당은 그 다음날인 22일 열린 국회에서 전날 자신들이 부결 선포한 개헌안에 대한 번복 결의를 시도하고 나섰다. 세계 헌정 사상 이미 부결처리된 안을 다시 뒤집는 번복 결의를 한 예도 못 들었지만 이런 수단을 통하여 만든 헌법으로 나라를 이끌겠다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겼다는데 더 큰 비통함을 느꼈다. 결국 나는 여기서 자유당과 더 이상 노선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중대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개헌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는 야당과 적극적으로 합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선 당장 눈앞에 떨어진 번복 결의를 저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태의 결과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개헌에 반대한 자유당의 소장파 의원들과 야당의원들의 퇴장을 진두에서 도왔다. 의사당밖에 나와 울분을 가다듬은 다음, 이대로 참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떤 결판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순간 나는 개헌의 주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평소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비교적 젊고 정의감이 투철한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뜻을 모아 자유당에서 탈당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며칠 후(12. 9), 뜻을 같이하는 동료 의원들과 함께 국회 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리 준비한 공동성명을 통해 자유당에서 탈당할 것을 밝힘과 동시에 야당 대열에 합세해서 반독재투쟁에 앞장설 것을 천명했다. 이날 우리 일동은 "1인 독재의 뿌리를 내리려는 사사오입개헌은 불법 무효"임을 밝힌 다음 "호헌을 위해 생명을 걸고 기꺼이 반독재투쟁 대열에 앞장서 나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날 나의 자유당 탈당은 이승만 정부의 부도덕성을 주시하고 있던 국민들로부터 크게 환성이 터져나오게 했다. 그리고 우리 12명의 탈당은 저물어가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희망의 불씨가 되었으며 한편 집권 여당인 자유당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야당으로서는 단합과 새 활로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