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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비극 6.25


민족의 비극 6.25


    해방을 맞은 나는 보다 넓은 곳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부산에 있는 각 중학교에서는 일본인 학생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학생들이 부족했다.

    경남 곳곳에서 머리 좋은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도 이때 경남중학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그 당시 중학은 6년제였음) 나는 새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이 나의 학창시절 중 황금기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동급생과 싸울 필요도 없었고 교사에게 반항할 이유도 물론 없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깍듯한 후배, 자상한 선배로 언제나 깔끔한 복장의 모범학생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공부에 치중하기보다는 운동에 관심을 더 많이 갖기 시작해서 공부벌레로 남지 않고 운동과 학업을 하는 데 있어 똑같이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의 학업성적은 중상위권에 머물러 있었으나 국어와 역사를 특별히 좋아해 관련서적 탐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즐겨했었다. 웅변실력을 발휘하면서 교내에서뿐만 아니라 교외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했으며, 또한 축구를 좋아했으므로 축구부에서 레프트 하프나 센터 포드를 맡으면서 졸업할 때까지 축구를 즐겼다.

    1948년에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48년은 유엔 한국위원회 감시하에 5.10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되고 드디어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돼 자주독립국가로서 첫발을 내딛은 해였다.

    나는 이 모든 역사적 사건을 애송이 철학도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는 정치인, 그것도 이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포부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있었다. 해방 이후 좌우의 이념대립이 격해지고 뜻하지 않은 국토의 분단이라는 새로운 짐을 안은 국내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자주독립정부의 탄생을 학수고대했으며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정치란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수 있는 소명과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정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일 때여서 각 대학의 정치학과는 패기와 야심에 넘친 청년학도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 역시 중학시절부터 키워온 정치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정치학과에 지망하려 했지만 정치학과에 진학한다고 해서 모두 정치인 행세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치학도입네 하고 정치가연하는 허세가 정치에 대한 신선한 매력을 감소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자 정치학과 대신 철학과를 지망하도록 마음이 변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의 수강 태도는 정치학과 철학을 6 4 정도로 배분해서 공부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갔다. 철학과 친구들로부터 색깔을 분명히 하라는 농담어린 우스갯 소리를 자연스레 주고받은 만큼 남들이 보기에 나의 행동은 얼른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파행이었다.

    전공인 철학보다는 부전공인 정치학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정치 입문을 하게 되는 1950년에 비극의 6.25가 터졌다.

    6.25는 내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8.15 해방 때 느꼈던 것보다 더 심하게 머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 전쟁이 어떻게 해서 벌어졌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나는 적 치하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성을 잃은 짐승들처럼 총칼을 앞세워 무고한 사람들을 사상의 저울로 달아 가두거나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나는 숨어 지내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이 전쟁이 역사에 어떻게 성격 지워지는 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나는 서울을 빠져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무역회사에 다니던 옛 하숙 동료 임필수라는 친구를 만나 서울을 탈출,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군량리의 친구 고향집에 내려가 숨을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기약없이 때를 기다리며 죽은 듯이 숨어 있어야 했다. 국군이 남으로 밀려가고,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살벌해진 적치하여서 신분을 감추고 농부로 변신하여 막연히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딜 수 있었던 인내와 용기는 역시 바다가 일찍이 나에게 베푼 연단의 덕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6.25 동란 3개월을 적 치하에 숨어 있을 때 내 생애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분명히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항상 생각하고 감사한다.

    내가 친구 임필수 군을 따라가 숨어 있던 군량리는 마을 전체가 임씨들만으로 이루어져서 숨어 있기가 비교적 그만했다. 그런데 낙동강까지 밀려 있던 국군이 반격을 개시하고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될 무렵(8월 하순)이었다. 어느 날 그 동네에서 이장을 지내셨던 유지 한 분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 느닷없이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내무서에서 그 임씨를 잡아가려 하자 온 동네 사람들이 걱정하게 되었다. 이때 서울에서 내려와 숨어 있는 학생인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젊은 마음에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믿고 따르겠냐고 다짐케한 다음, 청장년들로 하여금 마을 어귀에 보초를 서게 하고 외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면, 또는 군 인민위원회)들은 무조건 체포토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외부인 몇 사람을 체포하자 우선 무기가 필요했다. 나는 임필수 외 세 명과 함께 대월면 내무서를 습격하기로 했다. 우리 다섯 명이 조심스럽게 내무서에 다가가 마침 보초 서 있는 두 명을 전격적으로 달려들어 때려뉘고 따발총과 장총을 빼앗고 내무서원을 결박했다. 그리고 무기를 갖고 마을로 돌아왔다. 일을 시작할 때는 용기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막상 일을 치르고 나자 불안은 더욱 가시지 않았다. 돌아가는 전황으로 보아 곧 패잔병들이 마을로 몰려 닥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차에 가까이서 총소리가 들려오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나는 임군과 상의한 끝에 우선 우리가 마을에서 일단 도망가기로 했다. 그것이 마을 전체의 화를 피하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동안 몸담아 숨겨준 마을에서 짐을 챙겨 길을 떠났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특히 둘이 함께 뭉쳐다니는 것은 더 위험했다. 그래서 임군은 용인 쪽으로 가고 나는 서울을 향해 서로 헤어졌다. 길목마다 패색이 짙은 공산군이 철저히 검문하는 살벌한 길을 따라 나는 신분증 하나 없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3일 만에 겨우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며칠을 숨어지내는 중에 9.28 수복을 맞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6.25가 나던 1950년 처음으로 정치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중학교 때부터 길러온 웅변실력 덕분에 1949년,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2등상인 외무부장관상을 탔었다. 그 때에 상을 준 외무부장관은 장택상이었다.

    내가 그 분과 가까워진 것은 1950년 5월 30일에 있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장택상을 도우면서부터였다. 나는 대학 동료 20여 명과 함께 그분의 선거구인 경상북도 칠곡으로 내려가 40여일간 그분과 침식을 같이하며 찬조연설을 하는 동안 장택상의 당선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장택상이 제2대 국회의원에 진출하게 되자 나는 학교로 돌아왔고 한 달도 채 안 되어 6.25가 터진 것이다.

    미처 피난을 못가 이천까지 도망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숨어지내다 9.28 수복을 맞이하나 1.4 후퇴 때는 일찍 서둘러 남하, 서울 문리대 동문이던 손도심 등과 어울려 51년 2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나는 문리대 사학과 주임에서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옮겨 앉은 이선근 박사에 의해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배치됐다. 비록 계급 없는 군인이었지만 8개월 동안 대북방송을 하다가 당시 국회 부의장을 맡고 있던 창랑 장택상의 부름을 받아 그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만난 창랑 선생, 나는 그분의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학업을 계속, 서울대를 졸업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참으로 불행했던 시절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고 곧 이은 정국의 혼란을 틈타 준동한 사상적 갈등이 민족분단으로 이어져 결국 동족상잔의 처절한 6.25를 겪고 말았다. 참으로 숨막히는 역정을 걷던 상황 속에서 정치에 입문한 나로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바람직스럽지 않았던 숱한 오류들로 인해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국가의 치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봄으로써 각오를 새로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6.25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 불행했던 세월의 상처가 각인돼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생사의 기로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인내를 시험하는 무대에서는 끝까지 참아냈고,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비겁하게 물러나지 않았으며, 나의 청년기를 지배했던 정치에의 염원도 실현했으나 6.25는 내 운명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또한 민족분단이 낳은 비극적 산물로서 내 생애에 있어 매우 소중한 교훈을 안겨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