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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일제


내가 겪은 일제


    내가 태어난 1928년은 일제가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고 나서기 위해 저들의 식민지국가를 수탈하면서 힘을 쌓던 시기였다. 철이 들기도 전인 다섯살 때 학문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계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웠고, 일곱살이 되었을 때는 집에서 10여리나 떨어진 소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 온 국민이 신음을 하던 때에도 할아버지의 개화사상에 힘입은 나는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943년에는 중학교에 진학하여 할아버지는 물론 온 가족에게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중학에 다닐 무렵에는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차츰 자각하게 되었다. 아주 우연한 목격이었지만 일본인 교장 선생의 이사를 거들던 나는 한국 사람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만큼 귀한 물건인 설탕을 포대째 발견하고 말았다. 물론 심사가 뒤틀린 나는 운반 도중에 설탕 포대를 입으로 물어뜯어 길가에 줄줄 흘려버림으로써 일본인 교장선생을 분노케 만들었다. 결국 나의 고의적인 심술임이 탄로나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풀이 죽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내게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관대하셨다. 이후 어른들이 문제를 해결하셔서 학업을 계속할 수는 있었으나 그때부터 줄곧 나는 조국과 일본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통영중학교는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보다 3배 가량 많았는데, 일본인 선생까지 합세해서 항상 문화적인 문제로 한국인 학생들을 멸시하는 비열한 작태를 노골적으로 보이곤 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혼이 담겨 있음에 진배없는 된장, 김치 냄새를 못 맡겠다고 트집을 잡는가 하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등 갖은 못된 짓을 서슴지 않던 일본인들을 상대로 나는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7월, 방학도 없이 사천 비행장에 끌려나가 방공호를 파는 작업장에서 싸움이 벌어져 급기야 내가 일본인 급장을 흠씬 두들겨 패준 사건이 터졌다. 나는 또 다시 정학 처분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의 감격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마는 거리마다 동리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제의 악랄한 폭압의 사슬에서 벗어난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축제가 벌어졌었다. 나의 경우 유년기와 소년기를 통해 일제를 경험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뭔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일본인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학대가 극심했다. 나는 늘 일본인 학생이나 선생을 상대로 말썽을 피워 문제아로 남기를 원했다. 애국심과 항일 의식을 구체적으로 의식하지 못한 채였지만 그 시절 나를 지배하려 했던 환경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훌륭하신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일제의 갖은 수탈 속에서도 비교적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던 내가 적당히 안주하고 적당히 순응하려고 했다면 굳이 일본인들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할 리가 없었으나 죽은 듯이 앉아서 그들이 주입시키는 황국 사상이나 신민 의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일제 시대를 살아온 한국사람들이라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테고 똑같은 행동을 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외모나 성격, 그 어디를 보아도 얌전한 학생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도, 나는 줄기차게 사건을 만들어나갈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물론 내게는 동지도 많았다. 통영중학 시절 전체 학생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한국 학생들 모두가 나의 동지였다.

    대동아 전쟁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오직 승리만을 외치게 했고 그들 스스로가 마치 전승국의 국민이기나 한 양 거들먹거리며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게끔 만들고 말았다. 특히 일본 남학생들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면서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일이 교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자 나와 동지들은 그들의 못된 버릇을 고쳐주기로 마음을 다지고는 일본인 몇 놈을 하교 길에 붙잡아 뭇매를 가했다. 단순한 어린 학생들의 주먹다짐이 아니었다. 어른들끼리의 잔인한 전쟁이 바다에서 밀림에서 한창일 때 우리들도 논바닥에서 뒷동산에서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셈이다.

    결과는 으레 우리에게 불리했어도 체형이나 체벌을 비겁하게 피하려 들지 않았다. 나와 동지들은 공범으로 책잡히기보다는 언제나 주범으로서 처벌받기를 원했다. 이같은 다툼이 자주 발생하자 일본인 선생들은 한국 학생들을 더욱 못살게 굴었고, 정학처분, 퇴학처분을 내리는 등 보다 강경한 칼을 휘두르면서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다. 앞서 말한 사천 비행장에서의 사건으로 정학 처분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전말을 식구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있었으나 곧 식구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식구들이 걱정하는 가운데도 나의 행동을 꾸중하거나 책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도 이렇다 저렇다 말씀을 안 하셨지만 나는 어르신께서 염려하는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만 해주기를 바라시던 할아버지의 심정으로는 마땅히 꾸중을 하셔야 하는데 철없는 아이들의 싸움질로만 여길 수도 없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없이 끝내 바라보기만 하셨다.

    하지만 집에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그 지루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동지들로부터 편지가 계속 왔는데, 등등하던 일본인들의 사기가 한풀 꺾이는 것으로 보아 일본의 운이 다해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외포리 선창의 바다 바람이 전에 없이 맑고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일본인들이 저 넓은 태평양의 어느 가까운 곳에서 연전연패를 모면하지 못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비행기는 바다로 떨어지고 배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외포리 바닷가를 거닐 때 해방의 외침을 들었다.

    하루 아침에 세상이 뒤바뀌어 그처럼 세도 당당하던 일본인들이 패전 죄인이 되어 한반도에서 허겁지겁 쫓겨가자 나는 정말로 날 것만 같았다. 일본인 학생들의 축 처친 어깨와 일본인 학생들의 의기소침, 특히 일본인 여학생들이 훌쩍거릴 때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너희들도 알게 될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그리고 너희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우리들 가운데 도망가는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당했던 만큼의 아픔을 안겨주려고 하던 사람도 있었다.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받았던 그들에게 떳떳한 이 땅의 주인으로서 힐책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일본인들에 의해 황폐해진 이 땅을 다시 부흥시키고 다시는 주권을 남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힘을 쌓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쫓겨가는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하고 있었다. 해방의 이날을 위해 피흘리고 쓰러져간 모든 지사, 열사들의 위업을 받들어 살아서 해방을 맞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는 자각이 나를 흥분시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