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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 선거때 학생유세반 조직해 지원


창랑 선거때 학생유세반 조직해 지원


    민국당 계열과 장면파는 이범석 씨의 족청 계열 그리고 원내 서클 신라회를 이끌던 장택상 씨와는 합당하기를 바랐으나 이 씨와 장 씨 둘 다 장면파와의 합당을 기피했다. 이들은 장면파에 일제하에서 군수를 지낸 사람이 많은 것을 빗대어 군수 집단이라고 했다.

    창당 과정에서 신익희, 조병옥 두 분은 장택상 씨를 신당에 참여시키는 일을 내게 맡겼다. 나는 장택상 씨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이다. 장택상 씨와의 인연은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웅변 대회'에 참가해 입상했을 때 그때 내가 받은 상이 외무장관상이고 당시 외무장관이 장택상 씨였다. 상을 주고받은 것뿐인데 그 해 국회의원 선거 때 창랑이 나를 불러 학생 유세반을 조직해 자신의 선거 운동을 돕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문리대생 20명으로 선거 지원반을 짜서 내려갔다. 요즘 해방 전후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창랑 같은 이들에 대한 시각도 여러 갈래라고 듣고 있다. 그러나 해방 정국과 건국 초는 그렇지 않았다.

    창랑은 8.15 후 김성수, 송진우 씨 등과 함께 국민대회 추진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국민 대회란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임시 정부가 환국해 독립을 주도하도록 뒷받침하는 국민대회를 조직하는 운동이다.

    이들 국민대회파의 김성수, 장택상, 김준연, 고려민주당의 백관수,조병옥, 김병노, 한국국민당의 장덕수, 허정, 윤보선, 김도연 같은 이들은 국내파 민족 진영의 중심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이나 구미(歐美) 지역에 유학해 동서(東西) 학문을 두루 익힌 지식인이면서 귀국해 일제하에 사는 기간 일체 협력을 거부했고, 그래서 해방 정국의 우파 진영 지도에 나설 수 있었다. 1950년대 국내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런 정도였고, 그것이 일반 인식이었다.

    우리는 창랑의 선거 운동에 자랑스럽게 나섰다. 창랑을 다시 만난 것은 6.25 전란 중이다. 창랑은 2대 국회 때는 국회 부의장을 맡았고 신라회라는 원내 서클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후반기에 학도병으로 복무하던 나를 차출해 비서로 일하게 했다. 그는 총리로 내정되자 나를 차출했기 때문에 나는 잠시 동안 부의장 비서실로 있다 총리실로 가서 창랑을 도왔다. 비서로는 1년 남짓 있었지만 2대 대통령 선거와 맞물린 기간이어서 1950년대 정치 격동의 현장을 체험으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강렬한 인상, 정치가 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의식이 나로 하여금 일찍 의회에 도전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런 특별한 인연도 있어 나는 창랑의 신당 참여를 개인적으로도 바랐다. 나는 창랑을 만나 조병옥 씨의 말을 전하고 신당 참여를 권고했으나 창랑은 거절했다. 나는 여러 날을 줄기차게 찾아가 창랑을 졸랐다. 처음은 신익희, 조병옥 씨의 심부름이었지만 이튿날부터는 내 의견으로 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