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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 개헌에 대항, 호헌동지회 결성


사사오입 개헌에 대항, 호헌동지회 결성


    당시 자유당은 원내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고, 무소속 10여명도 포섭해 통과를 낙관했다. 그런데 표결 결과는 1표가 모자라 부결되었다.

    임흥순씨등 무소속 의원 10여명은 찬성 쪽으로 가담했으나 우리들 자유당 내 12명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에 부결된 것이었다. 그런데 자유당 지도부는 다음날 사사오입을 적용해 개헌 정족수를 1석 낮춰 개헌안은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개헌 반대파는 이것을 위헌으로 규정했고, 이런 위헌사태를 반대하는 모든 정치인이 헌법 수호를 내걸고 모인 것이 호헌동지회다. 호헌동지회에는 개헌을 반대하는 모든 정파와 개인이 참여했는데, 정당을 만들기로 하면서 민국당과 장면 씨가 이끄는 원내 자유당파가 중심 세력이 되었다.

    두 정파는 호헌동지회 결성 이전부터 신당에 합당하는 교섭을 해 오던 사이였다. 민국당은 김성수, 조병옥 씨 등의 한민당과 신익희 씨의 국민당이 제헌 국회때 합당한 정당이다. 민국당은 제헌 국회를 지배했고, 2대 국회 전반까지도 원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파였다. 그러나 이대통령이 민국당을 멀리하면서 당세가 약해졌다.

    이대통령은 민국당의 전신(前身)인 한민당을 지주들로 조직되고 지주를 대변하는 당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국민들에게 한민당 계열에는 표를 주지 말라고 했다. 대통령의 당부를 국민들은 잘 따르던 때여서 민국당은 표를 잃었다. 최초의 직선제 선거인 195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는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농림장관 출신의 조봉암 후보에게도 훨씬 못 미치는 3위 득표밖에 못했다. 1954년의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국당은 15석에 그쳤다. 3대 국회의 2백 2석 중 자유당 1백 14석, 무소속 66석에 비교하면 민국당 15석은 참패를 의미했다.

    장면 씨의 원내 자유당파란 이대통령의 신당 운동에 호응해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원외파에 밀린 세력이다.

    이대통령의 자유당 운동은 하나는 국민회, 대한청년단, 농민회, 대한노총 및 대한부인회 등 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원외파와 원내 정파 중심의 두 갈래로 추진되었는데, 창당대회에서 이범석, 이기붕 씨 등의 원외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대통령도 유지 중심의 원내파보다 농민 노동자가 주축이던 원외파를 선택했다. 이렇게 되자 원내파 중 일부는 자유당 참여를 포기하고 장면 중심의 원내 서클로 남았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민국당이나 원내 자유당이나 둘 다 거대한 자유당 지배 체제 아래서 자기네들만으로는 야당의 역할조차 할 수 없었다. 이래서 신당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4사5입 개헌 파동이 일어나 호헌동지회는 세력을 넓힐 수 있게 된 것이다. 호헌동지회에 모인 각 정파들은 자유당에 겨룰 만한 야당을 만들기 위해서 광범한 재야 정파 통합이 필요했다. 지도부는 여기에 목표를 세워 재야 모든 정파와 개인을 포용한다는 민주 대동을 창당 원칙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농민층에 기반을 둔 조봉암과 임시 정부 계열인 한독당 등 진보그룹과의 통합에는 장면 씨 쪽의 흥사단계와 김준연 등 보수파가 기를 쓰고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