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두 살 난 어린이에게만 어머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반백(半白)을 지나 머리가 온통 희어지고 한국민주주의가 겪어 온 벼랑을 같이 넘느라, 이른바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내게 언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듯 담겨져 있었나 싶게 나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꽉 차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내 어머니는 1960년 민주당 정권이 수립될 당시인 5월 24일 밤 9시경 이북에서 남파된 간첩 2명에 의해 살해되셨다. 그때 시국의 급박함에도 나는 나의 모든 것, 정치 자체까지도 포기하고 싶은 절망에 빠졌었다. 따지고 보면 남과 북의 분단이라는 비극적 정치현실이 나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나에게는 나를 품에 안아줄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생각으로 더없는 고독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정치라는 것을 하다보니,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카터와 어머니와의 해후(邂逅) 장면을 보고, 불현듯 어머니가 내게 달려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내 어머니는 돌아가실 당시 52세이셨는데, 당시 교회의 집사 일을 맡아보셨다. 우리 동네에는 내 할아버지가 교회를 세우셨는데, 교회가 세워진 후 40호 가량 되는 동네에서 그 절반 가량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덕일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주부이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이름 그대로의 집사이셨던 것이다. 바다와 고기 잡는 일과 관련해서는 금기도 많고, 굿판을 벌여야 하는 등 미신적 요소가 많다. 특히 여인들 쪽에 그 미신이 많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어머니가 그 어려운 속에서 어떻게 동네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셨는지 잘 모른다. 여인들의 일 특히 주부의 일이란 그 과정이 묻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우 별별 고통을 다 견디었을 것이다.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 대(代) 이래로 어장(漁場)을 운영하는 관계로, 우리 집안은 뱃사람들과 마을사람들에 대한 뒷치닥거리로 일년 열두달 내내 바빴다. 음식을 해도 바다에 던지는 것이 많았고, 고기는 사람이 잡지만, 바다와 고기는 우리 집에 있어서는 상전이었던 것이다. 그 일을 어머니는 묵묵히 해낸 것이다. 그것도 언제나 푸짐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풋풋했고, 또 넉넉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는 바닷사람이었고, 굳이 표현한다면 바다에 어울리는 덕성(德性)을 갖추고 계셨던 듯싶다. 어머니의 부음(訃音)이 전해졌을 때, 그 뱃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동기간을 잃은 것처럼 울부짖던 표정들은 어머니가 그분들과 어떻게 지내셨던가 하는 것을 잘 말해주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을 쫓아가서는 그 일을 해냈다. 일을 만들어서 하시기까지 했다. 내가 결혼한 후로, 어머니는 우리들의 신접살림을 보살피러 더러 올라오셨지만, 그 어려운 교통편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하나라도 더 가져다 주시려고 애썼다. 그렇게 힘들여 올라오셨지만, 정작 내 집에서는 하루 이상을 계시지 않으려 했다. 핑계는 항상 어장이 바쁘다는 것이요, 당신이 안 계시면 안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신혼살림에 혹시나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배려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어머니가 더 계셔주실 것을 고집세웠지만, 한번도 이겨본 기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