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연세가 66세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생각건대, 적어도 거제도에서는 선각자였다. 거제도라는 낙후된 지역에 사시면서도, 그러나 생각만은 낙후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철저하셨던 것 같다. 당시 거제도에는 멸치어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할아버지는 맨 먼저 어장을 개척하셨고, 또 성공적으로 운영하셨다.
생활을 위한 일에도 이렇듯 충실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들의 교육에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쏟으셨다. 내가 학교에 들어간 것은 일곱살 때였지만, 그보다 앞서 다섯살 때부터 서당(書堂)에 나가게 된 것은 오로지 할아버지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요즈음 서도(書道)라는 것을 하게 된 것도, 서당에서 공부하던 기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글자를 쓰면서 나는 서당과 그리고 할아버지를 연상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서당 선생님의 훈도(薰陶)는 곧 할아버지의 훈도였고 서당과 할아버지로부터 가르침 받았던 그 분위기는 지금도 나에게 생생할 뿐더러, 내 마음과 분위기 속에 배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할아버지는 내 서당공부의 예습과 복습을 자상하게도 보살펴 주셨는데, 인자와 엄격이 본래 하나요, 또 그렇듯 조화를 이루어 배합되는 경우를 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그때 의무적으로 읽고 외웠던 한문구절들, 예컨대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같은 글귀를 요즈음 서도로 쓰면서, 비로소 그 참뜻을 깨닫게 된다. 결국 나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영향권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바 고루(固陋)한 분은 아니었다. 신구(新舊)가 공존하였다고나 할까. 내가 때맞추어 소학교에 입학하였던 것도, 할아버지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일곱살 때 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나보다 한 반 아래 있었던 김치호란 친구는 소학교 4학년 때 이미 결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살이 훨씬 넘어서야 소학교에 입학을 했던 것이다. 나는 소학교 때부터 하숙이란 것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외포리에서 학교가 있는 장목까지는 20여리가 되어 통학하기가 너무 고되었기 때문이다. 고될 뿐만 아니라, 통학길이 온통 나무로 뒤덮여 있어 낮에도 무섭기까지 했다. 소학교의 중간쯤부터 나는 장목에 있는 외가집에서 학교를 다니기도 했는데, 이는 남의 집에 얹혀 있는 내가 보기에 딱했는지 남의 집보다는 외갓집이 낫지 않겠느냐는 판단과, 또 어머니의 권고가 있고 해서였다.
어쨌든 내가 커 나온 환경으로 보아서 나의 교육여건은 지극히 불리한 것이었다. 이 불리한 여건은 오직 할아버지의 열성으로 극복된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당시까지만 해도 거제도에서는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에 다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또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웬만한 결단과 노력으로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할아버지의 옹골찬 결단과 확신의 결과임은 물론이다.
할아버지는 사업과 교육의 두가지 측면에서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일찍이 개화된 분이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도 집안의 내력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할아버지때부터 그 믿음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어장에 가보면 누구나 그것을 느낄 터이지만, 수산업하는 사람이나 어부들만큼 미신을 믿는 사람이 없다. 고기를 잡으러 떠나거나 고기잡은 배가 포구에 닿을 때 벌어지는 저 잔치 같은 분위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안전한 조업을 비는 굿판이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벌어진다. 만들어진 음식도 풍성한데, 그 음식의 절반 가량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분위기와 굿판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하고 있는데, 한때는 음식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한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경위와 이유로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교회의 집사(執事) 일을 보셨다.지금 생존해 계신 아버지도 장로(長老)이시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사이셨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제일 아끼고 좋아하는 밭에 신명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손수 지으실 만큼 교회 일에 적극적이셨는데, 이러한 할아버지의 노력과 선각으로 40호 정도 되는 우리 고향 마을의 주민 절반 이상이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교회에 나가시는 것과, 그리고 교회를 짓는 것 등등의 일이 어장을 하는 할아버지의 입장으로서는 보통의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며, 또한 교회 나가는 일과 관련하여 많은 애로를 겪었을 것 또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나는 중학교 재학 당시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교육과 신앙, 그 모두가 할아버지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할머니께서는 24년 전에 72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는데, 시골 할머니들이 그렇듯이 자식들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셨다. 그 가운데서도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해주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나 아닌 다른 자녀들도 각각 자기를 제일 사랑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그런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보시고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