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에 있어서 바다는 로맨티시즘을 느낄 수도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일 수밖에 없었을 성싶다. 내가 태어나서 최초의 기억은 세살 때인가 할 때의 일이다. 나는 혼자 바닷가에서 놀곤 했는데 하루는 우리 집에서 잡아다 소금에 절여 널어놓은 멸치를 정신없이 집어먹은 일이 있었다. 짜디 짠 멸치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니, 갈증이 나고 배에서는 야단이 날 수밖에 없었다. 급한 김에 논 배미에 엎드려 논물을 실컷 마시고 올챙이 배가 돼서 집에 돌아왔다. 그날 나는 어머니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기억이면서 또 바다와 관련한 최초의 기억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바다는 최고의 교사(敎師)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깊은 뜻이 함축(含蓄)된 말인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바다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 폭풍, 그 평화, 그 넓이, 그 깊이, 그 색깔,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하나의 교사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의 체내에 바다의 냄새가, 바다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배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바다 소리만 나오면, 거기가 내 고향이거니 하고 생각하는 습성이 배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있어 바다는 곧 고향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바다는 교사 이상일 수밖에 없다. 바다를 교사로 하여 내 정신이 자유스럽고 또 배운 것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나에게 있어 바다는 나의 생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예나 이제나 바다는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50을 넘은 지금까지도 나는 바다 없이 이루어지는 생활을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그나마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다 덕이었고, 지금의 생활도 바다로 인하여 이어지고 있다. 내 아버지가 어장을 경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어장이 내 성장과 생활의 기저(基底)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국 바다가 키워준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바다는 나로 하여금 나를 나이게 하는 기초인 것이다.
내가 곧잘 농담하는 것 가운데, 바다에서 사는 동물 가운데 제일 큰 동물이 뭐냐고 묻는 일이 있다. 대개는 고래가 제일 큰 동물이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한테 들은 것인지는 딱히 기억이 없지만, 내가 묻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새우라는 것이다. 새우란 놈은 그 넓은 태평양도 좁다고 웅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새우는 실제로 언제나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크게 뻗어나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농담도 바다를 객관화시켜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바다와 바닷가가 생활의 현장이고, 바다를 현장으로 하여 생존경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다는 이미 객관적 실체가 아닌 것이다.
바다의 속성 가운데, 그것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서 나는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에 비추어볼 때 바다가 주는 커다란 교훈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나의 경우, 바다로부터 무엇무엇을 배웠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것도 바다에 대한 외경(畏敬)이라든가, 바다가 워낙 커서 인간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배운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까지를 포함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바다가 무언(無言)이니만치 바다로부터의 배움 또한 무언의 그것이라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듯싶다. 그리고 나는 바다 없이는 살아올 수 없었던, 그리하여 지금도 바다에 매여 있는 한 인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