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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복지


사진      당시 총독관저 자리 물색에 내몰렸던 조선의 풍수사들은 고의적으로 용맥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만행을 도저히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조선총독을 지낸 사람들뿐 아니라 그후에 이곳에서 생활한 대통령까지 불행한 말년을 맞았다고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90년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중 [天下第一福祉]라는 표석이 청와대 건물 뒤에서 발견됨으로써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1937년 4월 2일 총독관저 택지 결정을 계기로 신축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습니다. 3월 22일 기공식, 같은 해 10월 12일에는 지진제(地鎭祭)가 열렸습니다. 당시 부지의 총면적은 야산을 포함해 5만 2천평, 관저 면적은 연면적 563.06평이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오늘날의 청와대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1938년에는 정초식(定礎式)이 있었고 같은 해 6월 13일에는 상량식(上樑式)까지 했으나 9월 2일 중·일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 공사가 일시 중지되었습니다. 7개월 후인 1939년 4월 5일 공사가 재개됐으며 39년 7월 25일 약 2년여의 공사끝에 준공되어 9월 20일에는 낙성식이 있었습니다.

    9월22일 미나미 총독과 비서진은 당시 서대문에 있었던 임시 관저에서 새 관저로 이사하였습니다. 이사온 미나미는 옛 이름을 살려 총독부 관저를 그냥 경무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1942년 우리나라를 떠날 때까지 경무대에 기거하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경무대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그냥 총독관저라는 딱딱한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8대 총독 고니소는 1942년 5월 29일 부임해 44년 7월 22일까지 총독관저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의 재임기간은 태평양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때인 만큼 관저의 신·증축이 금지되었습니다. 또 관저 북쪽 산기슭에는 지하방카까지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총독인 9대 아베는 1944년 7월 25일 부임해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 관저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는 8월 15일 일본왕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자 주요문서를 불태우고 집기를 닥치는 대로 부수며 건물의 일부마저 파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 관리들은 곧바로 총독관저를 떠나지 않고 1945년 12월 중순 미국 극동군 사령부 소속 14군단 사령관 하지중장이 옮겨올 때까지 계속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미 군정하에서 사실상 우리나라의 통수권자 역할을 했던 하지중장은 한국에 진주한 후 몇달간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을 오가다 총독관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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