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은 단 한 번도 공식화하지 않았는데 2년 동안 정치의 중심 쟁점이 되게 한 데는 평민당도 한 몫의 역할을 했다. 내각제 개헌은 민자당에게는 파쟁의 불씨였고 야당한테는 투쟁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정치만 어지럽게 했다. 내각제 개헌 문제는 나한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민자당 2년의 내각제 논의는 내가 경험한 것 중 가장 어렵고 곤란한 정치 문제였고, 잘못이 많은 실패한 기록이 아닌가 한다. 내각제 개헌은 정계 개편의 기둥이라고 할 민정당의 기본 구도였다. 민정당이 처음 구상한 정계 개편은 연립 정부였고, 연립 정부란 내각제하에서나 있다. 민정당과 평민당이 연립 정부를 전제로 내각제 개헌을 한다. 내각제하의 총선거에서도 선거 후 양당이 연립 정부를 한다고 공약한다. 아마 그런 단계까지 그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정당이 우리 쪽 통일민주당과 합당 교섭을 하던 때 우리 당의 대표 두 사람이 개헌에 대해 묻기에 "내각제 개헌에 반대하는 것은 통합을 반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각제를 합당의 전면에 내세워 국민들에게 야합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아무것도 안된다." 이렇게만 얘기를 해 주었다.합당 협상을 마무리한 1월 22일의 청와대 회담에서도 내각제 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노 대통령이나 김종필 총재는 내각제 합의를 완전하게 하자고 했다. 내각제의 장점을 많이 얘기했다. 우리 정치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도 내각제고, 세 정당이 한 정당으로 합쳐진 뒤 공존하면서 협력하는 데도 내각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셋이 완전 합의를 하고 이것을 문서화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우리가 당의 지도체제를 어떻게 짜자는 것과 개헌은 다른 문제다. 당내 문제는 합의도 하고 문서화할 수 있다. 그러나 개헌은 합의할 수는 있어도 이것을 문서화해서는 안된다. 내각제 개헌이라는 것은 우리 셋이 합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나는 우리가 경험한 개헌의 역사까지 얘기하면서 반대를 했다.
개헌이 어렵다는 것은 개헌의 역사가 말해 준다. 우리 헌정사를 보면 집권자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직접 나섰던 개헌은 결국 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자세히 보면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불행을 불러들였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은 4사 5입 파동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자유당은 개헌선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의 야당은 대체 정국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랬는데 4사 5입 개헌 파동에 자극되어 흩어져 있던 재야 정파들이 하나로 결속해 야당을 만들면서 자유당과 겨룰 수 있는 야당으로 성장했다.박 대통령이 3선 개선을 하던 때도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에 성공해 넓은 지지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야당은 별로 강하지 못했다. 강한 지도력을 행사하던 윤보선 씨는 정계를 물러났고, 학자 출신의 유진오 씨가 야당의 당수였다. 그랬는데 3선 개헌 저지 투쟁을 하면서 유진오 총재는 야당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했다. 박 대통령이 1972년 유신 헌법을 만들 때는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1980년 전두환 씨의 신군부가 5공 헌법을 만들던 때도 계엄령 발동, 국회 해산, 정치활동 금지에다 정치인의 대량 구속과 연금이라는 비상 수단을 하나 더 보탰다.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해 낸 사람들은 모두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고도 1970년대 이후는 계엄령이라는 비상 사태를 만들어 놓고서야 개헌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들이 경험한 개헌의 역사다.물론 민자당이 하려는 개헌은 정권 연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민주화를 하고 있고 개헌한다 해도 새 헌법의 혜택을 받을 것도 아니다. 민자당 역시 내각제 개헌이 집권의 수단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개헌의 역사 때문에 국민은 개헌 논의에 아주 민감하다. 개헌이 순수해도 여당이 내놓으면 일단 그 정치적 의도부터 헤아려 보게 되어 있다. 국민의 정치 의식도 높은 수준에 있다. 더욱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언론이 야당의 활동을 여당 못지 않게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3당이 합당하면 국회의 개헌선은 확보한다. 그러나 개헌이 국회의 개헌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야당이 반대하고 국민이 찬성하지 않으면 개헌은 할 수 없다. 개헌에 대한 나의 판단은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