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총선 참여는 갑작스레 결정한 것이 아니다. 전두환 정권의 기본은 들러리 야당이었다. 민한당과 국민당이라는 들러리 야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는 90대 10으로 표를 나누고 국회의원은 50대 30대 20선으로 의석을 나누어 민주 제도의 모양을 내고 싶었다. 민주화운동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이 틀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식 투쟁을 하고 규제자 선언문을 내고 민추협을 만든 것은 전두환 체제의 틀을 깰 1985년 선거로 가는 준비이기도 했다.
내가 신당 창당에 나서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그들은 신당이 잘해야 3당이 되어 5공의 틀 속에 묻히고 말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나는 제1 야당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국민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나 궁금한 것도 많고 답답하고 불만스럽다. 그러나 야당도 언론도 제 구실을 안하니까 국민들이 체념해 버린 것이다. 잠복해 있는 정치 욕구는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 정치가 회복할 가망이 보이면 폭발한다. 선거 투쟁으로 뇌관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었다.
신당 운동의 환경은 아주 나빴다. 1983년 가을 규제자 선언문의 서명을 받으러 다니면서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 집에선 문전 축객도 당하던 내가 이민우 씨를 보고 '정치 규제에서 풀리거든 신당을 합시다'라고 내 구상을 내비쳤더니 '돈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 라고 했다.그만큼 캄캄했는데 그런 사정은 1985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1월 31일 3차 해금이 된 뒤 민추협 멤버이면서도 풀린 김동영, 최형우, 김녹영, 조연하, 박종률 이 분들이 비민추 계열의 이철승, 이기택, 박용만 씨들과 합동해 신당을 만드는 협상을 시작했다.
민추협에서는 참여론과 거부론이 반반이었다. 풀리지 않은 사람으로는 김병윤 변호사가 거부 쪽에 가깝고 김상현 씨는 참여론 이었다. 지금은 작고한 박성철 씨는 워싱턴의 김대중 씨와 통화했는데 민추협이 신당에 참여하거나 총선거에 나서는 것은 반대하더라면서 완강하게 선거 거부론을 폈다. 나는 의사 표시를 안했다. 결정을 안 하고 시간을 끌었더니 민추협이 두동강난다고 아우성들이었다.
나는 그때 은밀히 신당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당이 성공하자면 세가지 일을 해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첫째는 재야 민주운동 단체가 선거에 참여하고, 둘째 민추협이 중심이 되고, 셋째 민한당에서도 신당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재야단체와 학생운동권 쪽에서는 선거 거부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선거에도 들러리 서고 잘해야 제3당이 되어 5공 구도의 들러리 야당이 될텐데 왜 그 짓을 하느냐는 것이었다.나는 신당이 제1 야당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면 꿈같은 소리를 한다 해서 거부 쪽으로 굳어질 게 뻔했다. 나는 이렇게 설득했다.선거 거부는 언론 자유가 없는 이런 판에서는 잘해야 신문에 1단짜리 기사로 한 번쯤 나올 뿐이다. 선거에 참여하면 합법적으로 반독재 투쟁을 벌일 수 잇다. 합법적으로 집회가 되고 법으로 군중을 모아주고 이 정권의 독재, 부조리, 부도덕을 공격할 자유도 보장된다. 국민들은 궁금해하고 답답해한다. 아무도 그걸 풀어주지 않으니까 무관심이 되어 있다. 국민의 정치 불만에 불을 질러야 한다. 그것은 선거 투쟁뿐이다.
둘째 항목은 내가 비민추 쪽에 두 가지 제안을 했다. 첫째, 신당은 민주세력이 중심이 되고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야 하며 민추협 등 재야 민주세력과 연대를 지속하는 정당이 될 것임을 내외에 약속해야 한다. 둘째, 민추협의 이민우 씨를 신당의 총재로 추대해야 한다. 비민추 쪽 사람들은 첫째 항목은 선뜻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민우 씨를 총재로 하라는 데 대해서는 난색이었다.당시 박용만 씨가 창당 준비위원회의 비민추 쪽 부위원장이었는데 창당 대회 전날 내가 그이를 불러 오늘 중 결정해서 내게 통보해 달라고 했다. 한밤중 박씨가 전화로 비민추 쪽으로는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났다고 통보해 왔기에, 알았다, 내 도움이 필요없다면 마음대로 하라, 나는 신당을 제2의 민한당으로 생각하겠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밤을 새며 회의를 한 것인지 새벽에 받아들인다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걸었다. 총재는 전국구로는 안 되고 지역구 그것도 종로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내가 예상했던 일이고 이미 준비를 해놓고 있던 일이어서 좋다고 했다.
세번째의 일, 민한당을 떠나오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극비로 추진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임박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사전 준비가 있었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풀리는 사람들로 민한당을 부수면서 신당을 만들 작정이다. 그때는 나한테 오도록 하라고 여러 사람한테 얘기해두고 있었다. 이 작업도 극비로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리라고 보고 교섭했는데 당선되어 오겠습니다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민당을 창당하고 선거전이 진행되던 때 모든 예상은 신당이 잘해야 20석을 차지해 민한당에 이어 제3당이 되고 결국 민정당이 설정한 정계 구도에 편입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나는 신민당이 제1당은 어렵지만 50석 이상을 얻어 제1야당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고 장담했다. 여러 사람들한테 내가 이 얘기를 하니까 가까운 이들은 그런 말을 자꾸 하면 실없이 되니까 안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이민우 총재한테도 틀림없이 제1 야당이 되는 것이니 전국구는 20번까지를 당선선으로 잡아 공천하라고 했는데 절반인 10번까지를 당선선으로 해 공천했다. 이민우 총재까지도 내 판단이 터무니없이 낙관적이라고 했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