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김대중 씨와 두 차례 대화


김대중 씨와 두 차례 대화


    야당의 분열이란 김대중 씨와 나의 관계를 말한다. 김대중 씨는 복권 이전부터 신민당의 고문이고 복권이 되는 대로 당의 고문으로 활동하리라고 나는 기대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김대중 씨는 복권된 다음날인 3월 1일 기자 회견을 통해 신민당에서 무엇으로 자기가 필요한가를 결정해주고 신민당의 그같은 결정이 국민이 납득할 만한 것이라면 그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나는 그것이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를 사전에 보장하라는 의미라고 읽었지만 그 제안은 그때 상황에서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3월 6일과 4월 4일 두 차례 만났다.4월 6일 두번째 만남에서는 정치 상황과 관련해 상당히 심각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김대중 씨는 군부 비토설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나는 내가 알고 있고, 듣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당시 일부 계엄군은 엄격히 말해 제도 바깥에 있었다. 대통령이 군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적으로 군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이것이 위험 요소이며 문제를 어렵게 한다는 점을 말하고 김대중 씨에게 입당을 간곡히 권했다.보수 정당인 신민당은 군부 비토설로부터 당신을 감싸주는 확고한 울타리고 방벽이라고 나는 말했다.김대중 씨도 이 점을 인정하고 측근들과 의논해 입당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둘의 대화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으며, 시국을 풀어가는 문제에서 우리는 의논하고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4월 하순이 되면서 정세는 아주 나빠지고 있었다. 민주화가 순조롭지 않다고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국민들의 불안이 커져갔다. 노동 쟁의도 일어나고 학생 데모도 점차 가열해지기 시작했다.4월 하순 나는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시국에 슬기롭게 대처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 사태는 개헌을 늦추고 정치 일정을 밝히지 않는 과도 정부에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주장도 정당한 방법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노사 분규가 폭력 사태로 번져 국민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 무엇보다 민주화가 소중하나 민주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데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 정치인이 맡겠다고 나는 호소했다.나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도 만나 5월 20일 국회를 소집하는 데 합의했다. 우리는 국회가 열리는 대로 계엄 해제를 결의하고 헌법 심의특위가 마련한 개헌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사정이 아주 나빠지고 있었다. 나는 국회가 소집되는 5월 20일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시국을 진정시키는 데 김대중 씨도 함께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5월 16일 동교동으로 김대중 씨를 찾아갔다. 나는 김대중 씨에게 국회가 열려 계엄 해제를 결의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하고 계엄도 해제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우리는 시국 인식에 의견을 같이 하고 공동 성명에서 학생들의 과격 행동이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구실을 주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나는 그날 김대중 씨와 단 둘이 만나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다.그랬는데 김대중 씨가 예춘호 비서실장과 이문영 교수를 동석시키고 나도 동행한 두 사람을 배석하게 해 깊은 얘기를 나누는 자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날의 만남이 1980년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아 둘만의 깊은 얘기를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