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이 열어놓은 민주화가 5.17로 꺾인 1980년의 경험은 우리에게 값비싼 가르침을 남기지 않았나 싶다. 권위주의 정부가 물러나면 민주 건설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 권위주의 정치 체제로부터 민주주의로 옮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1980년 서울의 봄이 민주화로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10.26의 충격을 권력 내부의 사건으로 축소하는 견해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그때 국민들은 부 마 사태로 유신 체제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원하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고 이웃도, 온 국민도 뜻이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박 대통령도 김재규 정보부장도 차지철 경호실장까지도 이런 사실을 깨달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마지막이 된 궁정동의 만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이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탱크로 싹 깔아 뭉개버리겠습니다라고 한 말은 내심은 두려웠기 때문에 과장되어 튀어나온 허세였을 것이다.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한 말들도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것과도 다른 얘기를 했었다. 뒷날 언론의 추적으로 보도가 되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은 진용을 바꾸어 시국을 수습해 볼 작정이었다. 나한테도 사람을 보내 화해를 청하고 수습의 조건을 물어오고 있었다. 유신체제의 중심부 모두가 유신 체제가 끝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그랬기 때문에 10.26 사태 후 야당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신 헌법은 생명력을 잃었다. 유신 체제의 핵심이라고 할 권력자들도 더 이상 유신 헌법을 유지할 수 없고 민주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들도 이제는 민주화가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공감대가 10.26 사태를 평화롭게 수습할 수 있게 만들었다.사실 10.26 전야는 폭풍 전야의 분위기였다. 부산 마산 사태의 파문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되려 하고 있었다.그랬는데 박 대통령이 총격으로 가게 되자 민주 세력은 행동을 정지했다.민주화운동 세력만이 아니라 사회 내부의 여러 분야, 여러 계층에 불안 요소가 있었지만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긴급 조치로 누르고 있을 때보다 더 충실히 일상 생활을 유지했는데 이것을 내일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억압과 독재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시민들은 사회발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변화를 순조롭게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부도 국회도 정상을 유지했다. 정부는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인수하고 내각을 이끌어 갔다. 국회의 여당도 신민당 의원들이 낸 의원 사퇴서 반대 결의를 했고 신민당 의원들도 모두 국회로 복귀했다.정치권이 할 일은 유신 헌법을 민주 헌법으로 고쳐 국민이 선택하는 새 정부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최규하 대통령 대행과 그 내각은 과도 정부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대세고 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