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비록 남 앞에서는 허장성세(虛張聲勢)도 피우지만, 실상 아무도 그 사람이 점심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점심때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점심때가 지나야 나타나는 것이다. 때로는 고기라도 씹은 것처럼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기도 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뒤를 밟아 봤더니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하여 파고다공원 같은데 가서 멀거니 하늘이나 쳐다보다가 점심때가 지났을 만하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굶기 위하여 자리를 뜨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그 사람은 점심 굶기 위하여 자리를 뜨는 사람을 존경하게 되었다.
생각컨데 야당하는 사람들의 현실이 점심 굶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찬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윗길인 셈이다. 어쨌든 찬밥을 매일 먹는다고 쳐도, 그것을 꼭 그렇게 꼬집어 말해야 옳은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찬밥 먹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찬밥 먹는 놈이라고 더운밥 먹는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하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미안해 하기는 커녕 거꾸로 조롱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오랫동안 야당을 하다보면 별별 일을 다 겪지만, 그 중에서도 끔찍한 일은 정신이상(精神異常)을 일으키는 것이다. 높은 기개(氣槪)와 우국충정을 가지고 고난 찬 야당 대열에 참가하였던 것인데 현실에 짓눌리다가 못해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이상된 동지를 보거나, 그 소식을 들을 때 그 슬픔과 조용한 분노는 무어라 형용할 길이 없다. 문전옥답(門前玉畓) 날리고 패가망신(敗家亡身)하기가 일쑤요, 대학 등록철만 돌아오면 그 비용 마련을 위해 오라지 않는 친구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그 처량함을 과연 배부른 사람들이 알겠는가. 더운밥 먹는 사람들이 알겠는가?
어릴 적 동문수학(同門修學)할 적에는 제일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 대부분 야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랜 야당생활이 똑똑한 사람으로 하여금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내게 하는 데 반하여, 그보다 못한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축적해 가는 것이다. 어느 사이에 만나기 귀찮아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남이야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가족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눈총과 시선도 따갑기만 하다. 무능한 가장(家長)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식들도 처음에는 존경의 눈길을 보내지만 차차 경멸로 그 눈길을 바꾼다. 술이나 좀 취해야 그 옛날의 호기(豪氣)가 나올까 맨숭맨숭해서는 어림도 없다. 집에서는 밖에서 저녁을 먹고 왔다고 말하고, 밖에서는 집에 가 먹겠다고 말하다 보면 이런 식으로 굶고 자는 날이 수도 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야당하는 사람의 고충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비판을 하라면 남에게 뒤질세라 야당을 잘 아는 척하는 사람도 야당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되는 수모(受侮)와 고충을 아는 사람은 실상 드물다. 내가 야당을 해서가 아니라, 나는 야당을 하는 사람들이 야당을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존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소설가의 하루]가 소설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만약 어느 소설가가 야당인의 하루를 소설로 형상화한다면, 국민에게 많은 감동을 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이들이 이토록 일상의 고통을 견디면서 그래도 야당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야당하지 말고 당적(黨籍)을 바꾸어 보라고 말한다면, 말한 사람 자신이 제 뺨을 맞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모욕이 없는 것이다. 물론 변절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당원이야 변절이란 인간으로서, 당원으로서 최대의 수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들이 야당을 계속하는 것은 그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젊었을 때부터 품었던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한 집권이 바로 그것이다. 그 모든 고통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들은 오늘도 그 야당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선지도 모르게 튀어나와서 힘을 배경으로 집권하기 보다는, 이들이 그들의 오랜 꿈과 변하지 않는 뜻을 이루어 집권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순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