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헌=야당'이라는 국민의 오래된 인식에 다소는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집권여당의 호헌론을 보면서 이번 우리의 개헌론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하고자 한다.
대저 1972년 10월의 이른바 유신정변에 이르기까지는 이 나라에 있어서의 정치논쟁의 기본적 형태는 집권세력에 의한 개헌기도에 대한 야당진영의 호헌투쟁으로 정리될 수 있다. 자유당 정권하의 부산 정치파동, 발췌개헌안 파동, 4사 5입 3선개헌 파동, 그리고 공화당 정권하의 1969년 3선개헌 파동은 그와 같은 정치논쟁의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민주헌정에 대한 위험과 파탄은 언제나 집권세력에 의하여 음모되고 또 이루어졌다.치밀하고도 계획적인 개헌음모는 54년의 5.20선거와 68년의 6.8선거에서 보는 것처럼 일찍이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부정선거를 수반하였으며, 끝내는 야밤중에 날치기 변칙으로 도둑처럼 개헌안을 처리하는 정치적 절도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그때마다 모든 비열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었고 기록적인 변칙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개헌을 통한 집권연장의 획책은 60년대 말로 끝났다.
72년의 유신정변은 개헌이라는 절차나 형식도 무시하고 민주헌정을 유린하는 폭거였다. 그것은 바로 쿠데타에 다름 아닌 것이다.유신정변은 파헌(破憲) 그 자체였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국헌을 준수하겠다고 한 그 서약을 파기하고 국헌을 파괴한 것이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 공화당 후보는 이것이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는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는 그 약속을 지켜 국민의 직접적인 지지를 호소하는 대신에 통대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제도를 만들어 100%에 가까운 지지로 영구집권의 길을 개척하였다. 이렇게 국민의 정부 선택권을 박탈하였을 뿐 아니라 유신체제는 권력의 영구화와 절대화까지를 획책하여 가히 1인의 1인에 의한 1인을 위한 체제를 구축하였다.
한 인간의 절대성과 무오류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면 긴급조치의 임의적인 발동권은 무한독재를 보장하는 규정이었다.실제로 그는 또 그렇게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가야 했는가. 또한 국회의원 재적수의 3분의 1을 임명하여 국회에서 과반수 내지 3분의 2선을 확보,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인권을 자유자재로 제한 유린할 수 있었다.
유신초기에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세력은 개헌 청원운동, 개헌 추진 현판식등 개헌운동을 벌였지만, 유신독재권력이 긴급조치로 개헌운동을 탄압하자 점차 개헌운동보다는 민주회복 유신독재 타파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유신정변체제를 완전한 헌정 중단사태로 보고 개헌이 아닌 민주회복을 주창한 것이며, 체제의 경직성으로 인하여 평화적 개헌의 전망이 차단당하자 유신체제 타파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