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3.1정신은 헌법전문(憲法前文)에 그 명맥(命脈)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일반 국민에게는 단지 공휴일의 의미밖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 해마다 서울시 주최의 기념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거의 의례(儀禮)에 그칠 뿐이며, 이때 발표되는 정부 당국자의 기념사는 대체로 "3.1운동의 저항정신을 오늘에 있어서는 참여와 긍정의 정신으로 전환시켜야 된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것뿐이다. 그런데 실상은 이러한 말 속에 이미 3.1정신을 왜곡하고 밀폐된 골방 속에 가두어두려는 의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자유당정권 때는, 그래도 이승만 박사가 항일(抗日)에는 적극적이었고, 또 자신이 일제와 투쟁한 관계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3.1절만 되면 각급 관서 및 학교 단위로 독자적인 3.1절 기념식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5.16 이후, 한일회담이 되면서부터 차츰차츰 거족적인 기념행사는 자취를 감추어버리더니, 이제는 그 형해(形骸)만 남게 되었다. 3.1절과 관련한 기념행사가 이렇게 축소, 위축된 데는 한일회담을 체결하고 그 이후 한일간(韓日間)의 정치.경제적 유착(癒着)을 형성한 공화당정권의 성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기념식과 관련한 3.1절의 외형상의 모습의 변화과정이라 한다면, 실제로 3.1절을 의식(意識)하는 당국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마다 3.1절만 되면 당국은 민주애국 인사들을 자택(自宅)에 연금(軟禁)시키거나, 체포, 연행 또는 자의반 타의반의 지방여행을 시키는 것이 최근에 와서 상례화(常例化)되어 왔었다. 3.1절만 되면 당국은 잔뜩 긴장하고, 3.1절을 무사하게 넘기기에 여념(餘念)이 없었다. 나 자신 신민당 총재로서 '75년 3월 1일에 발표할 예정이던 성명을 발표할 수가 없었고, 또한 가까스로 성명을 발표했으나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었다. 3.1절에 많은 사람들을, 그것도 민주주의 하겠다는 사람들을 가두는 것, 그것은 바로 3.1정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3.1절을 진정으로 기념하고, 3.1정신을 오늘에 키우고 가꾸려는 데 대하여 이와 같은 탄압을 하는 것은, 3.1정신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면 3.1정신이 무엇이기에, 당국이 3.1절만 되면 민주애국인사들을 자택에 연금시킴으로써, 사실상 3.1정신을 박해하고 가두려고 했는가. 겉으로 민족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민족의 고유하고도 절대적인 기념일인 3.1절에 그 뜻을 기리는 일체의 행위를 봉쇄하려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3.1절과 3.1정신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이러한 입장을 규명하는 일은 동시에, 그들 상반되는 두 세력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3.1운동은 1천 5백 여만의 국민 중에서 2백 여만명이 참가한 국민운동이었다. 전체 국민의 7분의 1이 참가한 대 민중 운동이었던 것이다. 1919년 3월부터 12월 사이에 일제 경찰당국에 검거된 피검자(被檢者)의 수는 1만 9천 499명이었고, 이를 직업별로 분석해보면 농민이 10,864명(56%), 학생 및 지식인이 3천 712명(20%), 중소상공업자가 2천 242명(11%), 노동자가 2천 216명(10%), 기타 555명(3%)으로서 전체 민중이 망라된 민중운동이었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의 어떠한 지도자들도 3.1운동이 이처럼 엄청나게 큰 민중운동이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하였으며, 이와 같이 큰 규모로 된 것은 33인이나 48인 등의 민족지도자의 지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중의 자발적 참가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의 주체는 민중이었으며, 민중은 그 누구의 지도도 없이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3.1운동을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조직하고, 참가하여 이 운동을 전국적 민중운동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이른바 민족지도자와 자발적인 민중지도자를 놓고 볼 때, 운동의 강도(强度)에 있어서나 일제에 의해 실형(實刑)을 받는 범위와 정도에 있어서 민중들 쪽이 받는 피해와 보복이 엄청나게 크다. 이 운동에서 7천 5백 9명의 민중이 일제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며, 1만 5천 9백 61명의 민중이 부상당하였다. 일제(日帝)는 33인에 대하여는 최고형을 3년으로 한정하였으나, 민중들의 강렬한 운동에 대해서는 최고 극형(極刑)을 여러 건 선고하였다.
3.1운동과 3.1정신을 민중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때, 3.1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키우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성격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것을 키우려는 세력은 민중적인 데 반하여 그것을 막는 세력은 반민중적(反民衆的)인 것이다. 민중세력이 민중의 각성과, 그에 기초한 자기 결단(決斷)을 추구함에 반하여, 반민중 세력은 민중의 자기각성을 방해하고 탄압하려 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식인들의 운동과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는 것만을 보아도, 3.1정신을 탄압하고 박해하는 세력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3.1정신과 3.1운동을 오늘에 되살리고 키우는 것을 한사코 봉쇄하려 하는 데는 그것이 민중운동이었다는 데 대한 패배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3.1정신은 정권의 안보에 위해(危害)로운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3.1운동의 이념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민족주의이다. 3.1운동에 의하여 어떠한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민족운동 역량이 강화되고, 그후의 민족독립운동의 확고한 원동력이 형성됨으로써 독립의 쟁취를 튼튼하게 보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자존(自尊)에 기초하여 세계평화와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민족주의의 이념을 표방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 있어서 집권자들이 그때그때마다 내세우는 것은 민족적 자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와 정의와 인류의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3.1운동에서 민중의 주된 대상이었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현실적 존재인 일본 극우(極右) 군국주의 세력과의 정치, 경제적 유착까지 진행되고 있다. 민족적 자존이 있다면, 세계평화와 정의, 그리고 인류공동선에의 기여를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추구한다면 세계의 지탄을 받는 인권탄압, 인권유린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어떠한 수식(修飾)을 갖다 붙인다 하더라도, 3.1운동의 빼놓을 수 없는 이념인 민족주의에 비추어 볼 때, 3.1정신에 대한 억압세력은 바로 반민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일본의 사양산업(斜陽産業) 공해산업 따위를 불러들여 한국 근로자의 저임금(低賃金)을 보장하고, 외국인 투자업체에 있어서는 노사쟁의(勞使爭議)까지 제한하는 일련의 정책은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생관광(妓生觀光)이 민족의 자존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리고 있으며, 일본 집권세력이 한국의 현실정권을 하수인시(下手人視)하는 작금의 작태를 볼 때, 공화당 정권과 유신정권의 반민족적 성격은 저절로 규명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반면에 3.1정신을 키우고 발양시키려 하는 세력은 진실로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의 통일이라고 하는 절대적 명제를 정권유지의 수단과 명분으로 이용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도, 집권세력이 민족적이냐 반민족적이냐 하는 것을 가름하는 중요한 자(尺)가 될 것이다.
3.1운동에 있어 제시되는 또다른 이념은 민주주의이다.
3.1운동의 민중운동적 성격과 민주주의적 성격에서도 이미 제시된 바이지만, 3.1운동의 정신이 민주주의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3.1운동에 의하여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현은 10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을 잇게 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민족정권의 단순한 계승이 아니라, 공화정체(共和政體)의 민주정부 수립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3.1운동의 민주주의적 이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때 수립된 임시정부는 각계 각층과 각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참가한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였으며, 구한말(舊韓末)의 정통성 대신, 민중 대표적인 성격에 입각하여 구성되었다.
3.1운동이 민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민족전체의 대 민중 운동이라는 관점에 서게 될 때, 과거의 독재정권이, 특히 유신체제 이후의 지배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유린하는 연장선 위에서 3.1정신을 탄압하고 가해(加害)하며, 가두어 두려고 했던 그동안의 이유가 확연하게 규명되는 것이다. 즉 그들 자신이 비민주세력(非民主勢力)이었던 것이다. 비민주 독재세력이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의 형식으로 3.1정신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이다.
나는, 3.1정신의 또 하나는 민중의 자기각성에 의한 민생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코자 한다. 이것은 물론 3.1운동 자체에서는 크게 표면화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1919년 3월에서 12월 사이에 일본경찰에 검거된 숫자 1만 9천 499명 가운데 농민이 1만 864명으로 55%를 차지하고, 중소상공업자가 2천 242명으로 11%, 노동자가 2천 126명으로 10%를 차지하여 전체의 76%가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업자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사회주의가 이 땅에 소개되기도 전이었으므로, 이것을 사회주의적인 것과 연결해서 보아야 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3.1운동 이후,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현저하게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3.1운동의 결과로서의 각성일 수도 있고, 3.1운동의 성격 가운데 이미 민생운동적 성격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3.1운동의 성격을 민생운동이라고 파악하는 데 인색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1923년 현재 전국적으로 107개의 농민단체가 결성되었고, 1922년 7월에서 9월 사이에 진주지방에서 펼쳐진 소작인대회는 삽시간에 전국 각지의 농촌에 파급되어 도처에서 소작쟁의가 빈발하게 되었는데, 특히 1923년 초의 순천(順天)지방 소작쟁의(小作爭議), 1924년 3월의 암태도(岩泰島) 소작쟁의 등은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농민운동은 1920년대의 항일 민족운동의 중요한 한 흐름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편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1917년의 노동쟁의는 8건에 참가인원 1천 148명인데 반하여 1918년에는 50건에 6천 15명으로,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에는 84건에 9천 11명으로 급증하고 있었다. 1920년 이후 일본자본이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되자, 1920년에 공장수 2천 87개, 종업원수 5만 5천 279명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4천 238개 공장에, 8만 375명으로, 28년에는 5천 345개에, 9만 9천 547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동자의 공급원이 1910∼1918년에 걸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 이후 계속되어 온 일제의 토지약탈로 인하여 농촌을 이탈(離脫)하게 된 이농민(離農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60년대 이후 공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등지고 떠나온 이농민과 농민의 자녀들이 공장으로 몰려온 것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3.1운동으로부터, 농민과 노동자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 사실에서 3.1운동의 또하나의 성격이 민생운동이었다는 시각(視覺)이 가능하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의 이러한 시각(視覺)이 타당한 것이라면, 3.1운동을 일단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은 '민중에 의해 주도된 민족, 민주, 민생운동'으로서 민족사(民族史)에 있어서나 세계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3.1정신을 은폐하거나 말살시키려는 시도는 바로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세력에 의한 민족, 민주, 민생운동 세력의 탄압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로써, 3.1정신이 왜 오늘에 일깨워지고, 발양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할 것이다. 그것은 마땅히 살아있어야 하고, 지금도 민중의 마음 속에 살아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