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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진 파동


백두진 파동


    1979년 유신 정권과 마치 사생 결단의 대결을 했지만 그것은 내가 원한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의회주의자이지 혁명가는 아니다. 그 해 박 대통령은 마치 내게 사적인 원혐(怨嫌)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도 박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거두어 들였다. 박 대통령과 나는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는 사이가 돼 버렸다. 1979년 당권 경쟁에 나서면서 유신 정권의 방해를 예상했고 그들과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유신 정권이 3월에 백두진 파동을 일으켜 더 일찍 나를 투쟁으로 내몰았다.

    백두진 파동이란 간단히 설명하면 박 대통령이 백두진 씨를 국회의장으로 지명했는데 야당이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를 하게 되니 대통령이 노했다. 그러자 공화당은 대통령을 노엽게 한 이판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나섰고, 그 기세에 겁을 먹은 신민당 이철승 당수는 고분고분해졌고 내가 "이 무슨 꼭두각시 노름이냐, 그렇게는 못한다" 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은 야당이 제 구실을 못할 때 정치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 사건이다. 이런 유신체제 하에서 내가 당권 경쟁에 나서는 것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무모해 보였다. 한 마디로 내가 싸울 경쟁자는 이철승 연합 부대만이 아니고 박 대통령이고 유신 정권이었다. 당국은 당권 경쟁에 나서지 못하도록 할 속셈으로 미리부터 손을 썼다.

    예를 들어 9월 3일 새벽 경찰은 내 집을 수색해 각종 인쇄물을 압수해 갔는데, 이 작전은 노량진 서장이 직접 지휘했다. 같은 시간 종로에 있는 나의 한국문제연구소도 종로 경찰서에서 수색을 했다. 상도동 내 집 앞에는 경찰 초소를 만들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내가 여론조사를 하느라 설문지를 5천 매 우송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배달조차 되지 않았다. 당내 사정도 좋지 않았다. 백두진 파동에서 보듯이 소속 의원들은 유신 정권에 맞서기를 꺼렸다. 내심은 어떻든 겉으로는 모두가 모나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 했다. 내가 경쟁에 나섰을 때 함께 뛸 의원은 열 명도 안 될 듯했다.

    나는 황낙주 김동영 최형우 세 의원을 불러 의논했다. "이 땅을 이대로 둘 수 없으니 나서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길 수 있는가. 돈도 없고, 무슨 수로 유신 정권을 당해 낼 것인가. 이번에 실패하면 타격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는 것도 안 되고……." 얘기가 길었지만 요약하면 이런 얘기다. 아마 두 시간 가까이 얘기가 쳇바퀴를 돌았다. 그러다가 김동영 의원이 먼저 딱 부러진 얘기를 했다. "나섭시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에 맡기고 해 보는 거지요. 합시다."라고 말했다. 두 의원도 "그 길밖에 없다. 죽기 살기로 뛰어봅시다."라고 했다.

    나는 이런 결론이 기뻤다. 동지들이 고맙고 믿음직했다. 나는 그들과 의논하던 때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설혹 패배할지라도 방관자는 될 수 없었다. 내 나름으로는 승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정부 여당이 유신 2기를 준비하던 1979년 봄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주 회복을 바라는 민의는 무르익고 있는데, 우리 야당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걸 확인했다. 내 판단은 말하지 않고 세 의원의 의견을 구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중심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우리는 열정 하나로 뛰었다. 나는 전국을 돌며 대의원들에게 연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