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에서 어느 곳에서보다 더 길게, 더 많은 확신을 가지고 연설했고 청중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개헌 운동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 널리 알려졌다. 국내는 긴급 조치로 보도가 통제되었지만 외신은 야당의 개헌 투쟁과 나빠지고 있는 한국의 인권 상황을 활발하게 보도했다. 해외 교포들도 국내정세에 관심이 높았다. 교포 단체들의 요청이 있어 나는 1975년 정초 미국과 일본 방문에 나섰다. 내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을 때인데 갑자기 정부는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를 한다고 발표했다. 국민 투표는 하나마나 였다. 비상국무회의에서 만든 국민 투표법은 정당의 투개표 감시를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투개표 관리는 일선 행정관서가 자기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그러니 투개표는 정부 뜻대로 조작할 수 있다.
정부가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하겠다는 것은 국민 투표를 통해 국민 대다수가 유신 헌법을 찬성한다는 결과를 조작해 내어 이것을 개헌 운동을 탄압하고 봉쇄하는 명분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신민당 총재인 내가 외국에 나간 틈을 이용해 국민 투표를 전격적으로 발표한 것은 등뒤에서 총을 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당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나는 국민 투표가 발표된 당일의 LA 연설회는 예정대로 했다. 집회 장소인 LA 컨벤션 센터에는 9천 명에 이르는 교민들이 나왔는데 교민 단체 간부들은 LA의 교민 집회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집회로 이 기록은 아마 먼 훗날까지도 깨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교민들은 유신 체제를 반대했다. 나는 이 집회에서 방금 유신 정권이 발표한 국민 투표는 요식 행위라는 것을 설명하고 우리들 야당은 속임수에 불과한 국민 투표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나는 미국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서울로 돌아와 신민당의 국민 투표 거부를 결의했다. 그러나 유신 정권은 국민 투표를 강행했고, 투표 결과 국민의 73퍼센트가 유신 헌법을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국민 투표가 민의를 반영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정부는 투표 결과를 유신 헌법 반대운동을 봉쇄하는 데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