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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의 논거


40대 기수론의 논거


    대통령 후보를 옹립하는 데 있어 어떤 특정한 세대를 한정지운다는 것은 물론 논리가 성립되기 어렵다. 법적으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자격은 40대가 넘으면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는 이상 40세 이상이면 어느 세대든지 원칙적으로 제한을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특수한 시점과 오늘날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정치적인 상황은 40대의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지도자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현실적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40대 기수론의 근거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우선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5.16 군사 쿠데타로 등장한 현 집권세력, 다시 말해서 71년 총선거에서 싸울 상대 세력이 야당의 평균연령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이다.

    둘째, 해방 후 25년 간의 야당의 법통을 이어온 오늘의 야당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훌륭한 지도자를 내세워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그 지도자들의 노쇠에서 온 신체상의 장애로 두 차례나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민족적 과업이 일보 직전에서 좌절하고 만 쓰라린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의 야당사를 되돌아보면 원통함을 금할 수 없다. 고 해공 신익희 선생이나 고 유석 조병옥 박사가 선거 직전에 팽배해진 국민적인 지지와 기대를 한 몸에 지닌 채 그렇듯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던들 이 땅에는 4.19 학생 혁명이나 5.16 군사 쿠데타와 같은 비극적인 역사가 없이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이 세워졌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5.15 대통령 선거 때 한강 백사장에 30만 인파를 모았던 고 해공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서함으로써 국민을 슬픔의 도가니로 몰았던 일, 그리고 3.15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이박사의 독재정권에 도전하고 나섰던 고 유석 조병옥 박사가 선거 1개월 전에 미국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위종양으로 타계하셨던 일(해공 신익희 선생의 급서는 1956년 5월 5일, 호남선 이리에서 생긴 일이고, 유석 조병옥 선생의 별세는 1960년 2월 15일의 신병(장암) 치료차 건너간 미국에서의 일이다). 이 두 분의 서거는 이 나라 민주정치 사상에 치명적인 상처를 준 경우이다. 그분들이 그때 보다 젊으셨더라면 이 나라 역사는 달라져 적어도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토착화가 실현됐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야당이 처해 있는 상황에 비추어 너무나도 엄숙하고도 가치 있는 교훈으로서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이와 같은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과 비슷한 뼈아픈 체험을 69년 3선 개헌 저지투쟁 과정에서도 겪었다. 그것은 유진오 신민당 총재의 신병이었다. 정당 정치 사회에서는 한 당의 당수는 그 당의 얼굴이며 힘인 것이다. 더구나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일시적인 당 해체까지 서슴지 않았던 신민당은 연로한 유진오 총재의 부득이한 신병으로 치명적인 힘의 약화를 가져왔던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야당이 3선 개헌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원인 중 중요한 한 가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3선 개헌 1969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3선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저질러졌던 불법개헌. 9월 14일 새벽,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은 국회 본회의장(지금의 시민회관 별관)에서 농성 중이던 신민회 의원 등을 따돌리고 제3 별관에서 단 6분 만에 개헌안을 통과시켰었다. 찬성 의원들은 박준규 의원등 122인이었다. 표결에 참석치 않은 의원은 모두 49명으로 유진오 등 44인의 신민회 소속 의원과 전 공화당 의장 정구영, 공화당에서 제명된 예춘호, 김달수, 양순직, 그리고 무소속의 서민호 의원이 그들이었다.)

    이와 같은 유총재의 와병이 개헌파동 직후부터 야당가에 대두한 40대 기수론의 동기를 자극한 것이다. 사실 67년 5.3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박사를 신민당 당수로 맞아들인 것은 71년의 야당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기 위해서였고 유박사 자신도 그것을 내다보고 그동안 어려운 당수직을 감당해 왔었다. 그분의 건강만 좋았던들 우리 야당사에 비록 비극적인 과거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71년에는 그분이 대통령 후보로서 나서는 데에는 큰 이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헌 과정에서 유박사의 와병은 71년을 내다보는 야당 진영에 중대한 경고를 발한 셈이다. 71년에 또 다시 연로한 지도자를 내세워 5.15나 3.15의 실패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한다면 이 나라의 역사는 또 한 번 오도된 커브를 돌게 될 것이라는 엄숙한 경고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교훈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 공화당 정권이라는 강적과 싸우는 데는 젊은 지도자가 기수로서 앞장서야 한다는 것은 71년에는 정권 교체를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국민적 염원의 실현을 위해서나 또한 지도자들이 젊어지고 있는 세계적 추세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오늘날 박정권의 강점이라고 하면 평균 연령이 젊다는 것이고 오랜 전통이 있긴 하지만 야당은 늙었다는 것이 큰 약점이 되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추세인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이 젊은 지도자를 원하는 미국 선거민들에 의해 뽑혔고 영국의 윌슨 수상이나 서독의 브란트 수상 또한 그러하다. 여기에는 젊은이에 대한 막연한 매력만이 작용한 때문은 아니다. 오늘날의 민주정치 사회의 선거운동 양상이 초인적인 정력을 요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의 복잡하고 다양해진 사회 속의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국무의 양이 너무나 방대해졌기 때문에 젊은 지도자가 빛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진사회에서도 이러할진대 한국과 같은 정치적 후진사회, 특히 여야의 힘의 불균형이 현저한 사회에서는 야당이 강력한 여당과 싸워 이기는 데는 젊은 지도자가 나서야 할 필요성이 몇 갑절 더 절실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71년에 박정희 씨와 싸워 3선 자체를 막아 정권 교체라는 역사적 민족적 과업을 실현하는 데에는 40대의 지도자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것이다.

    또한 대통령 후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박정권이 저질러놓은 갖가지 실정을 수습하고 그 위에 빛나는 치적을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에도 젊은 지도자의 젊은 정력과 젊은 감각과 젊은 용기와 젊은 추진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1970년 1월 21일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