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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성립과 한미조약


휴전 성립과 한미조약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만주폭격 등을 주장하는 맥아더 유엔사령관을 해임시키면서까지 한국전의 전면전쟁에로의 확대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을 다시금 분할시켜 놓은 휴전교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교섭은 장장 3년이나 걸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동안 전쟁은 열도를 더하여 치열함은 극에 달했다. 중공군의 대량투입으로 인해전술로 양상을 바꾼 전쟁은 격화할 대로 격화하여 미군의 피해는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막심했으며 그밖에 군사물자의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1952년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는 아이젠하워 당시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한국전쟁 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걸 만큼 심각한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타의에 의해 체결된 이 휴전협정에 따라 반도를 횡단하는 휴전선이 설정되고 경계선 양측에 각각 2킬로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휴전협정에는 유엔군 대표와 북한 대표만 서명했지 한국은 여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은 군사적으로 이 협정에 구속될 수 있었으나 군사 이외의 면에서는 휴전협정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었다. 휴전협상 과정에서부터 한국은 휴전협상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요구했었다. 휴전협정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권고조항이 있었다.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의 외국군의 철수,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를 교섭에 의해서 해결하기 위해 3개월 이내에 쌍방 측의 보다 고위급 정치회의를 각자가 임명하는 대표에 의하여 개최할 것을 여기에 권고한다.

    이에 의해서 판문점에서 이른바 정치회담이 한 번 열렸으나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결렬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은 휴전협정에 불만이었다.

    1953년 8월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 이대통령과 변외무장관을 설득하여 한미방위조약의 원칙에 합의했다.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한 경제원조를 조건으로 그해 10월 이 조약은 조인되고 이듬해 1월 28일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 조약의 중요성이나 그 의의를 벌써 잊어버리고 있는 듯하지만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이 무력침략을 받았을 때 미국은 여기에 대항해서 행동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은 또 미국과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견제되어 있다. 불의의 침략을 받았던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경찰군에 의해 구제되었으나 '대의제라는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통일된 민주적 독립국을 건설한다'는 유엔의 목표를 이룩하지 못한 채 국토와 겨레는 양분되고 남은 것은 비참한 전쟁피해뿐이었다. 한국은 유엔의 능력을 세계에 과시한 케이스였으며 동시에 미국의 세계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통일이라는 당면목표가 달성불가능하게 되자 휴전 이후의 대한정책의 당면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던 것이다.

    1. 한국은 현재의 휴전협정 상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적 경계를 금후 계속한다. 단 전쟁재발은 피한다.

    2.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장이 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세력을 정신적으로 지지한다.

    3. 미국은 세계적 참극의 사실로서, 또한 그 심벌로서 한국의 민중에 의해서 지불된 희생을 인식함과 동시에 전화로 황폐화한 국토의 부흥이 한국뿐 아니라 전 아시아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따라서 미국은 그 구제 및 경제발전을 위해 계속해서 다액의 경제원조를 제공한다.

    4. 한국의 지리적 위치와 경제적 제약을 고려하여 미국은 한국이 일본 및 기타 자유제국사이에 평화롭고 명예로운 관계를 수립할 것을 종용한다.

    5. 미국은 금후에도 한국통일 실현을 협의할 용의가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엔의 알선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하지 일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