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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


역사의 교훈


    흔히 정치인의 말로(末路)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상념(想念)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이른바 정치라는 것을 해온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만년(晩年)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에 나타난 바, 그 숱한 역사적 인물의 죽음들도, 지나쳐 버리기에는, 우리를 멈칫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당해(當該)시대와 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결과로 되었고, 또 그 죽음에는 그에 따른 인과관계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삶과 정치의 교훈으로서 우리를 조감(鳥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종신집권(終身執權)과 권력의 강화를 획책하다가 그를 따르던 부르터스의 칼에 쓰러진 로마의 영웅 줄리어스 시저의 죽음의 의미, 노예해방을 이룩한 링컨의 총격에 의한 충격적인 죽음의 의미, 그리고 왕의 노선(路線)을 끝내 거부하며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내 목을 치되, 내 아름다운 수염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하는 유모어를 남긴 토마스 모어의 죽음 등은 다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교훈을 담고 있다. 죽음이라는 결과는 다같이 일치하되, 죽음의 의미와 결과는 각기 다른 것이다.

    로마의 영웅 시저의 죽음은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진대, 로마의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될 한 인간이 자신의 과욕(過慾)으로 인하여 비극적 최후를 마친 경우요, 링컨의 죽음은 노예해방의 어려움과 정의의 실현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위대한 업적인 노예해방과 유명한 게티스버그의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더욱 위대하고 돋보이게 해주었다.

    한편 토마스 모어의 죽음은 통치권자가 아니라 통치권자 밑에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한 정치인의 죽음으로서, 왕의 유혹을 뿌리친 용기있는 신념의 선택으로서의 죽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용기와 신념은 오늘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카톨릭에서 성인(聖人)으로 추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 이 순간도 세계 도처에서 정치인의 타율적인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군사정권 아래서 숨져간 파키스탄의 부토는 죽음을 앞두고 오히려 더 민주주의에의 신념으로 하여 두렵지 않다고 했다던가? 반면에 팔레비의 죽음은 바로 병(病)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지탄과 원망 속에 외국을 전전하면서 겪어야 하는 수모와 모멸 속에 얼마나 괴롭고, 외로운 나날이었던가. 에티오피아의 셀라지에 황제의 처절한 죽음은 또한 독재와 영구집권의 결과가 과연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외국의 경우는 그만두고, 우리의 일천한 해방 36년의 도정(途程)만 살펴보더라도 숱한 정치인의 죽음과,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선생의 유세 도중에 있은 급서(急逝)와, 1960년 역시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서거는 한 정치인의 건강이 전체 겨레와 국가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다른 장(章)에서 고(故)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박사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어쨌든 이분들의 결정적 순간에의 서거는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꿈의 좌절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그분들의 죽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하나의 꿈으로 영속시키는 계기로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건강이 이렇듯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질 줄이야 당시에 어떻게 알았으랴.

    반면에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씨의 죽음은 과연 어떠했는가. 일제 치하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이승만 박사의 녹음방송을 들을 때 우리는 얼마나 흥분했으며, 그가 신생 조국에 그 모습을 나타냈을 때, 우리 민족은 그를 국부(國父)라고 부르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발췌개헌,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삼선개헌, 국가보안법파동 등을 거치면서 국부로부터 민주주의에의 적으로 전락하던 일련의 과정은, 그의 전공(前功)에 비추어 몰락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4.19 학생혁명에 의하여 조국땅-일제치하에서 그렇게도 목말라했던 조국에서 죽지 못하고 이역만리(異域萬里) 하와이에서 끝내 숨을 거두어야 했다. 그의 유해(遺骸)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 영구를 따르던 이 국민의 마음 속에는 그래도 그가 이 땅의 민주주의를 훼절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민의를 존중하여 스스로 물러났다는, 그리하여 4.19의 희생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는 한가닥의 그에 대한 사랑과, 일제시 독립운동을 지도한 노애국자(老愛國者)에 대한 경의(敬意)가 깔려 있었다. 이승만 박사를 그 지경에 이르도록 한 서대문 경무대(景武臺)의 주인공 이기붕 국회의장의 최후는 어떠했던가. 부인과 더불어 아들의 손에 경무대 별관에서 죽어가야 했고, 그 아들도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생각하면, 평화적 정권교체와 관련한 나라의 비극도, 개인의 비극도 거기서 끝나야 했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10.26 사태의 비극이 이미 5.16 당시부터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본시 군인이 정치에 개입해서 잘된 나라가 없고, 그 군인이 바람직한 종말을 맞이한 적이 없다. 박정희 씨에게도 처음에는 순수한 정열과 조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지 모른다. 또 그의 치적(治績) 가운데는 부분적으로 긍정할 측면도 있다는 것을 나는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 역시 가서는 안될 길을 걸었던 것이다. 6.8 부정선거, 삼선개헌, '72년의 유신선포 등이 바로 그것이다. '74년부터 남발한 긴급조치, 긴급조치가 긴급을 요하는 것이라면, 5년씩이나 긴급조치가 유효한 것은 그 긴급이 오로지 자신의 정권에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유신체제란, 그 자체가 무효이며 이미 효력이 없는 강압의 체제였던 것이다. 나는 10.26 사태는 정권 자체가 자기방어의 한계를 이미 넘어서게 되자, 민중의 민주주의에의 염원에 쫓겨 자체 내부에서 반란의 형식으로 표출되었다고 생각한다. 10.26 사태가 없었더라도 박정권은 미구(未久)에 숙명적인 파멸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마사태는 유신말기의 이러한 정황을 말해주는 사태였던 것이다. 내가 신민당 총재로서 박정권의 솔직한 퇴진을 요구했던 것은, 퇴진을 요구하는 그 자체에 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박정권의 영예로운 종말을 촉구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씨의 죽음은 한 개인으로서의 죽음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더 큰 정치적 의미와 교훈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