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언젠가 나는 형의 나에 대한 지나친 염려에 짜증조차 낸 일이 있었소. 난 참 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보오. 남에게 염려를 끼치게 해놓고, 오히려 짜증을 내니 말이오. 마치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뿌리치는 것과 같은 어리광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내게 형이 있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 크게 위안이 되고 있소. 언제나 나는 형의 속을 썩혔고, 애를 태우게 했소. 이제 내 머리에 서릿발이 꽤 내리기 시작한 것을 보면, 벌써 햇수로 30여년은 족히 형의 속을 썩힌 셈이오. 형이 이제 안심할 만하면 일이 터지고, 일이 생기고 했던 것이니, 예상되었다기보다는 대개가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요, 나만이 그 격변을 맛본 것이 아니라, 온 나라와 온 국민이 그런 격변을 겪었던 것이니 형의 나에 대한 걱정과 관심은 겨레와 조국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었던 것이오. 이번 겪는 일만 해도, 어디 나 혼자만이 겪는 것이겠소. 형의 나에 대한 각별한 걱정은 이러한 애국심의 기초 위에서, 나를 안다는 사실 때문에 덤으로 사서하는 걱정이었던 셈이오.
벌써 20년 전의 일인가 보오. 내가 청년 정치인의 얘기를 들을 때의 얘기이니 말이오. 그래 5.16 군사쿠데타가 터졌지요. 민주당 정권 8개월을 놓고, 민주당 정권의 공과를 가늠하려 한다는 것은 자기합리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오. 독재 20년에 대한 평가조차도 거부되고 있는 터에 그 20분의 1이나 25분의 1밖에 안되는 기간의 민주당 정권의 공과를 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오. 민주당 정권 8개월에 있었던 다소의 혼란은 민주주의를 잉태하는 과정에서의 혼란이었고, 그것을 기다리지 못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말하는 그들 세력은 그 후 20여년간을 한결같이 기다리라는 말로 국민을 기만하여 왔던 것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군사쿠데타는 적어도 이 나라 역사를 정치적으로 20여년 이상이나 후퇴시켰소. 군의 정치개입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가 없는 것이며, 군부의 정권장악이 있는 국가치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는 예를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오. 아마도 내가 형에게 걱정을 끼쳐드렸던 최초의 것은 5.16 이후 군정반대와 관련한 나의 투옥이 아니었던가 싶소. 내 기억으로는 이때 형은 남들처럼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괜히 사서 고생을 한다는 취지의 얘기를 그후에 들려주었소. 그것이 형의 나에 대한 지극한 애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몰랐던 바는 아니오.
나는 그때 감옥에서 성경을 열심히 읽었소. 이때로부터 나는 성경책을 내 곁에 항상 두고 보는 것을 일상화하기 시작하였는데, 나는 당시 성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나에게 있어 으뜸가는 계명으로 삼게 되었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장 30절)
우리는 오늘 이땅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간구원 사업에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손길보다도 권력의 폭력과 고문과 감옥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나는 무슨 일이 생겨, 내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내 자신이 참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를 위하여 목숨을 잃음으로써 얻으려는 자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나의 나 자신에 대한, 하나의 버릇처럼 된 질문이오. 그러나 이것은 실상 하나님의 준열한 질문이 아니겠소?
이때까지 나는 할아버지이래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신앙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오. 말하자면 엉터리 크리스천이었던 셈이지요. 나는 감옥에서 비로소 신앙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 것이오. 형도 읽고 또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른바 유신체제 아래서 종교인들이 오직 양심과 정의의 목소리를 높였다는 이유만으로 투옥이 되었고 그분들은 감옥 안에서 오히려 양심의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하오.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옥은 우리 시대의 죄악 앞에 굴복되지 않고 유혹 당하지 아니하는 정직한 크리스천으로 단련하는 곳입니다. 감옥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모순과 비리를 보다 극명한 마음으로 조명할 수 있고, 짓밟힌 인간들의 고뇌를 보다 절실한 아픔으로 터득할 수 있소.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순결한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할 수 있습니다.
얘기가 빗나갔소만, 믿음이야말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패라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오. 아시다시피 나는 그후 같은 독재정권에 의하여 초산(硝酸) 세례를 받았소. 이 사건이 또한 형을 얼마나 놀라게 해드렸는지 형도 기억이 생생할 것이오. 이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나를 죽이려는 음모요 획책이었던 것이오. 그 범인이 누구며 어느 기관인지 마음 속으로는 모두 다 알면서도, 아무도 그 말을 하려 하지 않았소. 신문도, 국회의원도, 모두가 같은 태도였소. 폭력 앞에서 온 세상은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람도 언론도 이미 말을 잃었던 것이오. 이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리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내게 계시처럼 와 닿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에게 초산 세례를 가한 범인이 한국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인 김형욱이라는 발언을 국회에서 하게 되었던 것이오. 나는 두려움없이 말했소. 두려움이 없었다기보다 나는 나의 신앙에 튼튼히 기대어 나의 목소리, 나의 진실을 밝힌 것이오. KCIA의 악명이 온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소. 죽음 속에서의 부활, 그것은 신앙의 신비요. 그러나 부활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참 면모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소. 목숨을 잃으면서, 진정한 생명을 얻으려 한다면 이 세상에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오. 나는 나 자신의 행위가 나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K형.
지나온 날들의 저 험한 얘기들이야, 몇 날 몇 밤을 한들 다할 수 없을 것이오. 그때그때마다 겪어야 했던 심려로 형이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자세히 기억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나에게 생생하게 재생되어지는 몇 가지 기억을 형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소. 역사는 현상만을 기록할 뿐, 내면적인 것까지야 헤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 심회의 일단을 형에게 전해두고자 하오.
YH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억도 새롭습니다. 1979년 8월 9일의 일이오. 아침에 노동자들의 고통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성직자, 지식인, 문인들이 나를 집으로 찾아와서, 나와 신민당의 도움을 요청했소. 그리고 내가 신민당 당사에 나갔을 때는 이미 180여명의 YH무역회사의 여자직공들이 신민당사에 와 있었소. 여공들은 이미 기숙사가 폐쇄되어, 잠 잘 곳도, 밥 지을 곳도 없다고 호소해 왔소. 내 딸애들 또래의 여자 근로자들이 말이오.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내 모든 것을 바쳐 그들을 보호하고 품에 싸안아야 한다고 생각했소. 그들을 껴안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하였소.
신민당은 국민정당적 성격으로 출발했고, 독재정권이 부패와 특권을 특징으로 하는 특혜 경제정책으로 나아갈 때, 야당인 신민당은 마땅히 억압당하는 사람의 편에 서야 되었던 것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그들 곁으로 갔어야 마땅했을 일입니다. 그들은 기다리다 못해 우리에게로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로 온 그들을 어떻게 저 캄캄한 밤 속으로 내보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닌게 아니라 이틀째 되던 날 밤부터 경찰이 신민당사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여공들은 당사를 포위한 기동경찰대를 보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날 밤 11시 20분, 나는 총재실에서 그들이 농성하고 있던 4층 회의실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소. 이때의 가슴 벅찬 감회를 어찌 필설(筆舌)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 내가 그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얘기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면, 살아남을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뿐이었소. 그리고 이 말은 사실상 내가 그 여공들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던 것이오. 이 말은 정치적인 발언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것이었고, 차라리 처절한 기도였던 것이오.
그날 밤 새벽 2시 나는 나를 둘러싼 16명의 국회의원이 무장경찰에 의해 두들겨 맞는 가운데 그 여공들과 마찬가지로 개처럼 당사로부터 끌려 나왔소. 이것을 두고 그들은 101작전이라고 했다던가 합디다만, 마포의 한밤중을 비명으로 채웠던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날 밤 여공 김경숙 양의 시체가 발견되었소. 경찰은 죽음의 원인을 창문을 뛰어내린 자살이라고 발표했소만, 그것을 믿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진상은 알 길이 없소. 김경숙 양의 죽음이 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충격이 수도 없이 나타났소. YH여공들의 식사를 날라다 주던 인근 식당의 여종업원이 자살한 것이 바로 그것이요. 구리개라는 이름의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처녀가 음식을 나르면서 보게 된 여공들의 참상과 끝내는 밤중에 기동경찰에 의하여 개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을 더 이상 보기가 싫어 몸을 던진 것이오. 이것은 비록 한 이름 없는 사람의 일이지만, 이 세상에 이렇듯 이름없이 자기의 뜻을 밝히는 사람이 어디 하나 둘이겠소? 지금도 그 처녀의 일을 애처롭게 느끼는 것은 나 한사람만이 아닐 것이오.
그러나 정국은 지나간 일에 자신을 붙잡아두지 않을 만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소. 신민당의 국회의원들이 YH 사태에 항의하는 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바로 그날, 나와 총재단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위한 공작정치가 그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오. 나의 총재당선을 무효로 돌리기 위한, 독재권력의 최후의 카드였던 가처분신청을 도둑처럼 몰래 법원에 해 버린 것이오. 그리고 예정된 스케줄과 절차와 결과에 따라 이유 있다는 기상천외한 판결이 뒤따랐던 것입니다. 거기에 총재 직무대행까지 지명을 했던 것이오.
나는 그 결정에 결코 승복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에서 국민의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바로 그날 불복선언을 하게 되었던 것이오.
"나는 오늘 서울민사지방법원의 신민당에 대한 결정은 야당을 말살해 정권의 영구화를 기하려는 박 정권의 부도덕한 정치음모에 사법부가 하수인 역을 맡아 조작된 비극적 소산으로 규정, 역사와 국민 앞에 고발, 규탄한다. 나는 국민적 공당(公黨)의 총재로서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모든 계층의 국민의 힘을 결집하여 범국민적 항쟁을 할 것이며, 이 항쟁을 통해 박 정권의 타도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반독재투쟁을 위한 불퇴전의 결의를 밝히는 선언이었던 것이오. 나는 이전부터 이미 나에 대한 구속을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소. 나는 생명을 다하여 민주주의를 되찾을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소. 이렇게 하여 독재정권은 나를 총재직과 국회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나에 대한 권력당국의 핍박은 살을 조이며 일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저들은 나의 투쟁선언을 완화한다면,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해줄 수 있다는 회유책을 나에게 펴왔던 것이오.
그들은 마침내 나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계기로 삼아 나를 국회로부터 추방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소. "주한미군을 내정간섭으로 볼 수 없다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압력 역시 내정간섭으로 보지 않는다"는 나의 발언을 문제삼기로 한 것이 바로 그것이오. 박 정권과 그 하수인들은 주한미군을 내정간섭과 연결시킨 부분을 가리켜 용공적인 이적행위이며, 민주화를 위한 압력을 정당시하여 내정간섭을 요청함으로써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생트집을 마련한 것이오.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 [뉴욕타임즈] 기자회견 내용에 대한 형식적인 해명만 한다면,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상을 제의해 오기도 했더랬소. 그러나 나는 잠시 살기 위하여 영원히 죽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지요.
그들이 정작 내세운 4개항의 징계 사유라는 것은 국민에 대한 명분을 생각했던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갖다 붙이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었소. 내가 외신기자 클럽에서 연설하면서 김일성 면담 용의를 표명해 국론분열을 획책했다는 것을 필두로 하여, 총재직 가처분에 불복하고 부도덕한 정치음모에 사법부가 하수인 노릇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법원을 모독했다는 것, 전주에서 있었던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모임에서 유신헌법을 부인해 국헌과 국민주권을 모독했다는 것, 9월 10일의 내외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궐기를 호소, 헌법의 질서를 파괴하는 선동행위를 했다는 것, 8월 23일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야당 말살음모를 중지할 것을 대통령에 충고하는 등, 국가원수 모독발언을 수없이 감행했다는 등 기상천외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야당총재에 대한 국회의원직 제명이 이루어진 것이오. 의원직으로부터 추방당한 야당총재가 겪어야 되는 비애와 고충이 어떤 것인지, 아마 형은 알지 못할 것이오. 나 자신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오. 나는 내곁에 정의가 있고, 국민이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 한가지 믿음으로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소. 그리고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그날그날을 견딜 수 있었소.
K형.
그 바쁘고 벅찬 나날 가운데서도 성경은 나에게 위안과 더불어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소. 내가 매일마다 펼쳐 읽었던 구절, 이제는 내가 스스로 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꼬대에서조차 외울지 모르는 구절을 한번 들어보시려오?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성경의 말씀대로 적으리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내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이사야 41장 10-11절)
K형.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또한 죽을 때까지 이 자세와 이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오. 설혹 이 걸음걸이로 하여 형에게 또 염려를 끼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형에게는 정말 죄송한 일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이오.
형께서 염려하시는 동안 나는 어떠한 자세로 지냈는가 하는 것을 두서없이 적어 보았소. 형은 천성대로 걱정과 염려를 하시되 나의 뜻이나마 헤아려주시기 바라오. 형이 나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게 될 때, 우리 조국은 형과의 즐거운 축배를 허락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