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성원해 준 국민 여러분께 더욱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와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하든 쌀만은 지켜야 하겠다는 신념으로 있는 힘을 다해 왔습니다.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오직 우리 나라만이 미련하리만큼 홀로 남으면서까지 비장한 각오로 노력했습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그 마지막 벼랑에까지 우리는 갔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한계상황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쌀을 지키기 위해 가트(GATT)체제를 거부하고 국제적 고아로 혼자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가트 체제를 수용하면서 세계화, 국제화, 미래화의 길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저는 과연 국가 이익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통령으로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길 가운데서, 국제사회 속에서의 고립보다는 가트 체제 속의 경쟁과 협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 나라로서는,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적 성장과 국부를 신장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국제적인 고아가 되어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도, 발전할 수도 없다고 보았습니다.
문을 닫고 지키는 쇄국보다는 문을 열고 나가는 개국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개방과 개혁, 바로 거기에 민족의 활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을 고려할 때,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분명히 우리가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저는 진실로 ‘이제 이 길밖에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타결이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시련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 시련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거대한 도약과 발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헤아리신다면, 그 동안 제가 겪어야 했던 고충과 진실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UR 협상의 흐름과 그에 따른 정부대책과 노력을 그때그때 소상하게 알려 드리지 못한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와 우리 정부는 그 동안에도 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하여, 민족의 피와 살인 쌀을 지키려고 보이지 않는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쌀 개방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정부가 먼저 쌀을 개방하려 한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그런 방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협상대표로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정부는 지금 이 순간도, UR 협상에서 마지막 하나라도 더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서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보고 드립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쌀 수입 개방을 완벽하게 막지 못한 데 대하여 거듭 국민 앞에 진솔하게 사과 드립니다. 저는 쌀 수입 개방 반대를 외치는 농민을 비롯한 이 나라 국민의 실망과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할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벌인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쟁을 연상하게 됩니다. 주화파인 최명길 선생은 이 나라가 오랑캐의 말발굽에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된다고 항복문서를 썼습니다. 척화파인 김상헌 선생은 오랑캐한테 항복할 수는 없다고 그 항복문서를 찢었습니다. 최명길 선생은 찢어진 항복문서를 주워서 다시 붙였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르기를, 항복문서를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고, 찢겨진 항서를 다시 주워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裂破者 不可無, 補褶者 不可無). 그 모두가 애국적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찬반양론 역시 나라를 사랑하고, 농민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목소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방론자는 매국노요, 반대론자는 애국자라는 이분법은 국론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부득이한 개방과 그에 대한 반대가 정쟁으로 번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합해 개방에 대비할 일이지, 네탓 내탓을 따지면서 편싸움을 할 일이 아닙니다.
국제사회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세계를 직시하고, 나라와 겨레의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국민 여러분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저의 충심을 이해해 주신다면,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우리의 모든 힘과 지혜를 모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치열한 국제경쟁 앞에서, 우리 내부의 국론분열과 정쟁은 우리 민족의 진취적 에너지를 스스로 소진하는 일일뿐더러, 변화와 개혁이라는 세계사의 큰 흐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낙오하게 만들 뿐입니다.
UR 은 우리에겐 개방과 국제화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입니다.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절대절명의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높은 비용, 낮은 효율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작의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농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개조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향이요 마음의 안식처인 농촌을 새롭게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농어촌 구조개선을 앞당기는 것, 농산물 개방과 관련한 이익을 농민에게 돌리고, 우루과이 라운드로 생기는 이익을 농촌에 환원하는 것은 물론 농가 보상, 농지를 비롯한 농업 관련 제도와 구조의 개혁 등 종합적인 대책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저는 관계 부처로 하여금, 결코 미봉책이 아니라 실제로 농민이 피부로 달라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우리 농업, 우리 농촌, 우리 농민 대책을 착실하게 집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대비, 농업구조 개선사업을 앞당겨 실시토록 하는 등 농업경쟁력 강화에 노력해 왔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쌀 개방을 감내할 만큼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데 대해 매우 안타깝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정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쌀 개방만은 한사코 막아야 하겠다는 그 열정과 애국심으로 개방 속의 우리 농촌을 구해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농촌, 우리 농민을 돌보지 않으면서 외국이 우리의 농촌, 우리 농민을 지켜 주길 바랄 수는 없습니다.
부득이한 개방으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농민의 고통을 모두가 나누어져야 합니다. 농촌과 농민을 향해 아픔을 함께 나누는 국민적 지원이 각 분야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국형 농업의 개발 등 자구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농산물과 농토를 사랑하고, 우리 쌀을 우리가 먹는 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막을 옥토로 만든 나라도 있습니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듯이 우리 농업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농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패배주의와 내부 분열, 그리고 책임의 전가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그 책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제가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스스로 다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속에서 고립되지 않고 어떻게든지 힘을 합해 이 어려운 시대를, 냉엄한 국제현실을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결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되겠습니다. 시련 앞에서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 되어서 이 시련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무서운 각오로 다함께 경제를 살리고, 농촌을 새롭게 일구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농업의 끝이 아니라, 우리 농업의 새로운 출발이 되게 해야 합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쌀 수입 개방을 막지 못한 죄책감을 가지고 더욱 더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겠다는 겸허한 약속을 국민 앞에 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1993. 12. 9. UR 협상 타결과 관련한 대통령 담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