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으로 박 대통령이 사망하자 79년 12월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대통령직을 승계,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80년 2월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이 복권조치되면서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았습니다.
그 동안 유신에 묶여 스러져갔던 민주화가 다시 꽃피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의 봄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끝이 났습니다. 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은 계엄 확대조치를 발표하면서 김대중을 용공혐의로, 김종필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구속하고, 김영삼은 가택에 연금하였습니다.

하지만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갈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80년 5월 18일,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하던 광주시민들과 계엄군이 충돌하였습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은 무자비한 무력진압을 감행,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대참변이 발생하였습니다.

80년 봄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본격적인 권력장악에 나섰습니다. 국가 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였습니다. 9월 1일 전두환 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고, 81년 1월에는 신군부세력을 중심으로 민주정의당이 창당되었습니다.

5공정권은 김총재를 가택연금한지 1년만인 81년 4월 30일, 그의 연금을 해제하였습니다. 그는 연금생활을 하면서 구상해온 일들을 실천하기 위해, 그 첫 출발로 '민주산악회'를 발족시키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82년 5월 31일자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5공화국 비난 기사가 빌미가 되어 그는 다시 가택연금을 당하였습니다.

재연금이 된지 1년만인 83년 5월 18일 그는 광주민주화 운동 3주년을 맞아 5공화국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습니다.

당시 정국은 신군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점차 퇴색돼 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단식투쟁의 영향은 국내외로 급속히 확산돼 갔습니다. 국내언론은 5공정권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지만, 외신을 통해 그의 단식투쟁이 알려지자 세계의 이목이 그의 사투에 쏠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흩어져 있던 재야세력들이 하나, 둘 찾아들었고, 민주화를 위해 다시 결합을 다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국내외 여론을 의식한 5공정부는 단식기간 중인 5월 30일, 그의 가택연금을 해제시켰습니다. 6월 9일.
그는 마침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은 이미 국내외에 엄청난 파문을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5공세력 등장 후 3년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화 운동에 불씨를 당겨놓았던 것입니다.

84년 5월 18일, 그는 '민주화 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으며, 85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해금 인사들과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이라는 5공 유일의 자생정당을 창당하였습니다.

85년 제12대 총선에서 창당한지 채 한달도 안된 신한민주당이 예상을 뒤엎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습니다. 29.4%의 득표율로 67석의 의석을 확보하였습니다.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었습니다.

선거를 통해 입지를 확보한 신민당은 총선 1주년을 맞은 86년 2월 12일. 민추협과 연대해 기습적으로 개헌서명 운동에 들어갔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하자는 내용의 1천만 서명운동이 곧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야권투쟁의 총본산으로 부상한 신민당과 5공의 정면충돌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잠시 침체돼있던 학생운동도 다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5공정부는 강경진압에 나서 5.3 인천사태를 구실로 신민당사와 민추협 사무실에 대한 강제 수색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민주세력과 5공정부 사이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던 와중인 86년 12월 24일, 신민당 이민우 총재는 송년기자 간담회에서 민주화 7개항을 제시하며, 여당의 수용여부에 따라 신민당도 내각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발표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총재의 이러한 입장은 기존 야당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민주세력의 뜻과도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생각끝에 김영삼 의장은 이민우 총재와 결별하였습니다. 87년 4월, 선명하고 강력한 야당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통일민주당이 창당되었고, 신민당 소속의원 대다수가 그를 동조해 신당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전두환 대통령은 들끓는 여론을 무시한 채 대통령 간접선거를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특별담화로 발표하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태도에 민주 세력은 잠시 주춤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박종철군 고문 치사 은폐기도사건이 폭로되자, 부도덕한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6월에 들어서면서 호헌 철폐와 직선 개헌을 외치는 시위대의 행렬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습니다.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지명 대회에서 전대통령은 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직선개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도처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습니다.

전대통령은 이처럼 거센 시위에도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시위는 더 확산돼 갔습니다. 마침내 민정당의 노태우 총재는 6.29 특별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대한 집권 세력의 항복선언이었습니다.

6.29 선언으로 국민들은 오랜 군부통치의 종식과 정권교체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은 분열되어,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제각기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습니다.

1987년 국민직선으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후보는 민주세력의 후보가 아니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였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였음에도 여당 후보에게 참패를 당한 것은 야당의 후보단일화 실패, 야당끼리의 치열한 공방과 지역감정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