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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으로 박 대통령이 사망하자 79년 12월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대통령직을 승계,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80년 2월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이 복권조치되면서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았습니다. 그 동안 유신에 묶여 스러져갔던 민주화가 다시 꽃피는 듯하였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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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정권은 김총재를 가택연금한지 1년만인 81년 4월 30일, 그의 연금을 해제하였습니다. 그는 연금생활을 하면서 구상해온 일들을 실천하기 위해, 그 첫 출발로 '민주산악회'를 발족시키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82년 5월 31일자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5공화국 비난 기사가 빌미가 되어 그는 다시 가택연금을 당하였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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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금이 된지 1년만인 83년 5월 18일 그는 광주민주화 운동 3주년을 맞아 5공화국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습니다. 당시 정국은 신군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점차 퇴색돼 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단식투쟁의 영향은 국내외로 급속히 확산돼 갔습니다. 국내언론은 5공정권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지만, 외신을 통해 그의 단식투쟁이 알려지자 세계의 이목이 그의 사투에 쏠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흩어져 있던 재야세력들이 하나, 둘 찾아들었고, 민주화를 위해 다시 결합을 다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국내외 여론을 의식한 5공정부는 단식기간 중인 5월 30일, 그의 가택연금을 해제시켰습니다. 6월 9일. 그는 마침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은 이미 국내외에 엄청난 파문을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5공세력 등장 후 3년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화 운동에 불씨를 당겨놓았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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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계기로 잠시 침체돼있던 학생운동도 다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5공정부는 강경진압에 나서 5.3 인천사태를 구실로 신민당사와 민추협 사무실에 대한 강제 수색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민주세력과 5공정부 사이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던 와중인 86년 12월 24일, 신민당 이민우 총재는 송년기자 간담회에서 민주화 7개항을 제시하며, 여당의 수용여부에 따라 신민당도 내각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발표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총재의 이러한 입장은 기존 야당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민주세력의 뜻과도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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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국민직선으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후보는 민주세력의 후보가 아니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였습니다.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였음에도 여당 후보에게 참패를 당한 것은 야당의 후보단일화 실패, 야당끼리의 치열한 공방과 지역감정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