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신민당은 89석을 확보함으로써 공화당 정권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막강한 야당으로 떠올랐습니다.

민주화 세력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박 정권은 강경책으로 나왔습니다.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71년 10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을 투입하고 휴업령을 내렸습니다.

급기야 12월 16일에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27일에는 야당 의원들의 눈을 피해 공화당 단독으로 국가보위법을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미해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71년 9월 20일에 열린 남북적십자 회담을 시작으로 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잠시 통일의 꿈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를 교묘히 이용, 영구집권을 겨냥한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0월 17일 특별선언을 발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한편,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된 것입니다.

당시 김영삼 의원은 미국 하버드 대학의 초청으로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방송으로 소식을 들은 그는 서울 집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 부인 손여사는,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구속되고, 비서까지도 체포되었다'며 그의 귀국을 늦추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를 초청한 교수진들과 미 국무성 관리들도 투옥을 우려하며 귀국을 적극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만류를 뿌리쳤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던 사람인데, 나 혼자만의 안전을 위해 남을 수는 없다', '동지들과 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자택에 연금되었습니다. 12월 27일,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이용,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유신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인 권한이 부여된 채 제4공화국의 철권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상도동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박 정권의 행태에 개탄하였습니다. 정국의 타개에 고심하던 그에게 유진산 총재가 몇번씩 찾아와 다시 일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김의원은 각오를 새로이 다지며 활동을 재개했고, 73년 2.27 총선에서 또다시 당선되면서 제9대 국회에 진출하였습니다.

9대 국회는 대통령 추천으로 들어온 유정회 의원들과 공화당, 그리고 친여 무소속 의원들이 대부분이어서, 총의석의 1/3에도 못미치는 야당 의석으로는 다수의 횡포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박 정권은 73년 8월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하는 등 횡포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김영삼은 12월, 신민당 부총재로서,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인으로서, 유신타도를 선언하였습니다. 신민당은 개헌 추진을 당론으로 확정하고 12월 26일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에 착수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은 74년 1월, 민주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 및 2호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국민 운동은 점점 거세게 번져 나갔습니다.

개헌운동이 확산중이던 74년 4월 유진산 총재가 사망하였습니다. 신민당에는 새로운 총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74년 8월, 소수파였던 김영삼 의원은 전당대회에서 승리를 거두며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45세. 야당에 김영삼 시대가 개막된 것입니다.

김영삼 체제하의 신민당은 활발한 반유신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74년 10월, 김총재는 국회에 '개헌 심의위원회' 설치를 제의하는 한편 중앙당에 개헌추진본부를 두어 각 도단위로 개헌추진 지부의 결성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언론계에도 영향을 주어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확산되었고,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설치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김총재는 또 미국과 일본을 방문, 해외동포들로부터 개헌 추진에 대한 협력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12일 유신 헌법 찬반 국민투표가 가결됐고, 유신 체제는 굳어져 갔습니다.
야권은 강력하고 단일화된 민주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양일동 등 4자회담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이 무렵 월남전쟁에서 후퇴를 거듭하던 월남 정부군이 4월30일을 기해 월맹군에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월남의 공산화는 곧바로 국내 정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박 정권은 반공을 명분으로 민주화 운동을 더욱 강경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민당의 개헌운동도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76년 삼일절을 기해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유신을 규탄했으나 박 정권의 탄압 정치는 한층 강화되었고, 김영삼 총재도 자리에서 밀려났습니다.

77년, 김의원은 '야당성 회복투쟁위원회'를 결성, 보다 확실한 대여 투쟁을 결의했으나, 선명성을 잃은 야당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1978년 박정희는 다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침내 유신체제에 대한 심판이 국민으로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78년 1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득표율이 공화당을 1.1% 앞질렀습니다. 79년 5월, 국민들의 반유신 의지에 힘입어 당내 비주류로 몰려있던 김영삼은 전당대회에서 극적으로 당권을 탈환해 박 정권의 정치포석을 뒤흔들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균열은 박 정권의 성장제일주의의 가장 큰 공로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큰 희생자였던 노동자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79년 8월 9일 회사측의 일방적인 폐업 조치로 생존권을 잃은 YH 여공들은 신민당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였습니다. 신민당은 대책위를 구성해 정부측과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정부측은 이 사건을 해결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폐업 철회의 구호는 유신 철폐로 바뀌었고, 박 정권은 신민당사를 기습, 무력 진압에 나섰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박 정권은 김영삼 총재의 총재직을 직무정지시키고 의원직을 박탈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제1야당의 총제 제명 사건은 말기적 행태를 여실히 드러낸 공화당 정권의 폭거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25년간 몸담아오던 국회를 떠나게 되었고, 그의 뒤를 따라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의원직 제명 사건으로 빚어진 정치 파동이 유신 체제의 종말을 앞당겼습니다.

10월 17일. '김영삼 총재 제명 취소'와 '유신조치 철폐'를 외치며 부산대학생들이 시위를 시작, 4.19 혁명의 진원지였던 마산 시민들이 봉기함으로써 이른바 부마 사태가 촉발되었습니다. 전국이 반정부 시위로 들끓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피격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8년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였으며, 유신 체제의 종말이기도 했습니다.

10.26 사건 이후 김총재의 직무정지 가처분은 철회되고, 그는 다시 신민당 총재로 복귀하였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도약의 기회가 다가오는 듯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