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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세력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박 정권은 강경책으로 나왔습니다.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71년 10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을 투입하고 휴업령을 내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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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71년 9월 20일에 열린 남북적십자 회담을 시작으로 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잠시 통일의 꿈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를 교묘히 이용, 영구집권을 겨냥한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0월 17일 특별선언을 발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한편,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된 것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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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귀국하자마자 자택에 연금되었습니다. 12월 27일,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이용,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유신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인 권한이 부여된 채 제4공화국의 철권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상도동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박 정권의 행태에 개탄하였습니다. 정국의 타개에 고심하던 그에게 유진산 총재가 몇번씩 찾아와 다시 일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김의원은 각오를 새로이 다지며 활동을 재개했고, 73년 2.27 총선에서 또다시 당선되면서 제9대 국회에 진출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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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붕괴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균열은 박 정권의 성장제일주의의 가장 큰 공로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큰 희생자였던 노동자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79년 8월 9일 회사측의 일방적인 폐업 조치로 생존권을 잃은 YH 여공들은 신민당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였습니다. 신민당은 대책위를 구성해 정부측과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정부측은 이 사건을 해결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폐업 철회의 구호는 유신 철폐로 바뀌었고, 박 정권은 신민당사를 기습, 무력 진압에 나섰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박 정권은 김영삼 총재의 총재직을 직무정지시키고 의원직을 박탈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제1야당의 총제 제명 사건은 말기적 행태를 여실히 드러낸 공화당 정권의 폭거였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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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김영삼 총재 제명 취소'와 '유신조치 철폐'를 외치며 부산대학생들이 시위를 시작, 4.19 혁명의 진원지였던 마산 시민들이 봉기함으로써 이른바 부마 사태가 촉발되었습니다. 전국이 반정부 시위로 들끓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피격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8년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였으며, 유신 체제의 종말이기도 했습니다. 10.26 사건 이후 김총재의 직무정지 가처분은 철회되고, 그는 다시 신민당 총재로 복귀하였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도약의 기회가 다가오는 듯하였습니다. |